1968년, 감독 신상옥 출연 신영균 <EBS> 10월14일(일) 밤 10시
1960년대 신상옥 감독이 최고의 흥행사였음은 두말할 나위가가 없다. <성춘향>에서 <빨간 마후라> 등 당시 신상옥 감독은 스타시스템을 능란하게 활용하면서 다양한 장르영화 문법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당시 그의 필모그래피에 두 작품이 눈에 띈다. 하나는 <연산군>(1961)이고, 다른 하나는 <대원군>이다. 이 두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마치 서로를 마주 보는 한쌍의 거울 같은 느낌을 준다. 두 영화 모두 정사(正史)로부터 일정 정도 소외된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사극이면서도 대중친화적인 작업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신상옥 감독은 전작 <연산군>에서 생모에 관한 기억에 시달리면서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 일대기를 다룬 바 있는데 <대원군>에선 왕위에 오를 아들 앞날을 위해 ‘미친 놈’ 소리를 들어가며 수모를 겪는 인물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게다가 주연배우로 모두 신영균을 기용했다. 두 영화는 신상옥 감독이 사극을 흥행장르로 충분히 ‘해체’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 그리고 조선시대 정치사를 1960년대 국내 상황에 대한 비유의 틀거리로 사용한 점에서 흥미로운 작업이다.
대원군은 다른 양반들에 철저하게 멸시를 당한다. 왕족이긴 하되, 그에게 정치적인 실권이라곤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집권세력은 왕족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눈에 띄는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고 대원군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거의 절반 정도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다닌다. 술과 여자에 빠진 대원군을 보고 양반들은 비웃거나 그를 철저히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철종이 승하한 뒤 대원군은 조대비의 환심을 사고, 마침내 꿈에도 소원하던 바를 이뤄 차남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한다.
<대원군>은 영화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흥선대원군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대신, 몇 가지 일화만으로 그의 캐릭터를 설명해낸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대원군은 양반이지만 체통을 지키는 것엔 별 관심이 없다. 왕족이라는 신분임에도 그는 “이 판국에 뼈다귀 타령이 무슨 소용이야”라는 험한 말을 던지며, 기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 한밤중에 담을 넘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신상옥 감독은 때로는 정사와 야사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 캐릭터를 약간은 과장된 톤으로 설명해낸다. 그렇다고 영화가 장황하게 흐르는 것은 아니다. 멸시와 모욕을 받으며 살지만 내심 정치적인 야심을 한켠에 숨기고 있는 인물의 내면을 영화는 간결한 어조로 해설한다. 영화를 보노라면 신상옥 감독이 얼마나 뛰어난 심리묘사와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춘 연출자인지 깨닫게 되면서 놀라움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영화는 실존했던 흥선대원군에게도 가장 흥분된 시간이었을 법한, 왕위에 오르는 아들을 대동한 그의 행차길을 결말로 삼는다. 이제껏 덜 떨어진 인간으로 취급받던 그가 처음 기세등등하게 욕망의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