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희는 언제나 양복 차림이었다. 셔츠 단추를 몇개씩 열어젖히는 대신 넥타이를 졸라맨 단정한 양복 차림. 흔히들 기억하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는 곧고 바른 남자였다. 그러나 사이사이 야구를 연습하고자 노란색 야구 글러브를 끼고 스튜디오로 들어닥친 그에게선 수줍음을 찾을 길 없었다. 항상 손을 놀리고 바삐 움직여야 하는 활달한 성격이었기에 인터뷰 내내 한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이 도리어 불편해 보였을 정도였다. “정색하고 질문하려니 어색하다”는 말에 “아니, 왜 그렇냐”고 반문하는 솔직한 두 눈을 보자니 어쩌면 최양일 감독의 <수>가 조금은 다른 그를 확인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한때 잔혹한 시대에 멍들고 지쳤던 지진희가 ‘해결사 수’로 돌아왔다. <오래된 정원>의 현우에 가슴 시렸던 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일 터. 하지만 <여교수의 은밀한 유혹>의 만화작가 석규가 뿌린 적나라하고 불편한 유머를 거둔 다음이니 그 변화에 호기심도 일었다. 쌍둥이 동생 태진을 찾기 위해 19년을 감내한 살인청부업자 태수는 결국 그와 마주하지만 그 순간 동생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사살된다. 복수심에 마음을 빼앗긴 태수는 누가 왜 태진을 죽였는지 추적하기 위해 경찰인 동생으로 위장한다. 해결사 수에서 복수의 수로, 마침내는 목숨 수(壽)로. 자꾸만 미끄러지는 ‘수’의 뜻만큼 그의 말은 길어지고 또 그만큼 깊어졌다. ‘하드보일드 클래식’이란 영화 홍보카피에 걸맞게 한층 다부진 지진희와의 인터뷰를 여기에 옮겼다.
-<수>는 이전 출연작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지닌 작품이다. 어떻게 출연을 결심했나. =일단 액션물을 언젠가 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또 하고 싶었다. 봐서 알겠지만 내가 실은 굉장히 활발하다. 운동한 다음날 온몸이 막 쑤시는 그런 느낌도 좋아하고.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나. =주인공이 살고자 하는 이유가 계속 바뀌는 게 흥미로웠다. 최양일 감독님이 연출한다는 것도 그렇고.
-최양일 감독은 불같은 성격에 무섭다고 소문이 자자한 분이다. 어땠나. =먼저 나는 한번도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음,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일을 하러 모인 거지, 사귀려는 것도 아니고(웃음) 싸우려는 것도 아니지 않나.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무서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맞거나 때렸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감독님이 기본을 지키려고 하는 분이란 사실은 확실하다. 뭔가가 자기 성격에 안 맞아서 예컨대 그 전날 설사가 나서(웃음) 화를 내는 그런 분은 아니다.
-일부 장면을 위해 더미를 만들기도 했다던데 자신과 똑같은 형상을 보며 섬뜩한 기분도 들었을 것 같다. =맞다. 그게 죽은 시체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요즘은 더미를 굉장히 잘 만들어서 꼭 내가 눈감고 있는 것 같더라. 사실 얼음 속에 넣어둔 더미를 사진으로 찍어서 집사람에게 보내줬다. 추운 날 나는 다 벗고 이렇게 고생한다고 말했더니 속더라. (웃음) 완전히 속더라. 그럴 정도로 완벽한 더미였다.
-예고편만 봐도 액션의 강도가 무척 세던데 액션신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나. =아무 준비없이 갔으면 문제가 심각할 수 있었지만 액션스쿨에서 2개월 정도 일주일에 최소한 서너번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콘티를 짜고 각본대로 움직였는데 감독님이 싫어하시더라. 결국 간략한 동작만 맞춘 다음 그냥 싸웠다. 그전에도 오만석씨가 빨랫줄 같은 끈으로 내 목을 조르는 장면이 있었다. 계속 NG가 나기에 날 죽인다고 생각하고 진짜 조르라고 했다. 도저히 못 참겠으면 손을 들겠다, 그때 멈춰라. 나중에는 정말 졸랐는데 눈이 빠질 것 같고 혓바닥까지 막 나오더라.
-부상도 많이 입었겠다. =합 맞추고 싸우면 더 많이 다친다. 어디 하나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몸을 안 사렸기 때문에 오히려 덜 다쳤다. 사람들이 미안해하던데 칼 잡는 데 지장없으면 붕대 감고 그냥 했다. 어차피 안 찍을 건 아니니까.
-전작인 <오래된 정원>에는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총각무는 정말 맛있게 먹더라. =새로운 음식이 나오면 과자든 음료수든 다 먹어봐야 한다. 지금은 다이어트랑 여러 가지로 못 먹어서 너무 안타깝다. (웃음) 어렸을 때부터 음식을 깨작깨작대면 많이 혼났다. 그때 그 총각무는 너무 맛있어서 불 꺼지면 멈춰야 했는데 계속 씹어먹었다. 어둠 속에서 무가 막 올라간다. (웃음) 임상수 감독님은 웃겨죽으려고 그러더라. 오케이 그렇게 해, 그래서 한두번인가 다시 했다. 이번 영화에 섹스신이 하나도 없어서 먹는 장면으로 대체했을지도 모르지. 사회적 억압을 으적으적 씹어먹는 걸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상추쌈이 생각나네. 진짜 맛있었는데.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오래된 정원> <수> 등 개성이 뚜렷한 작품들을 선택했다. 시나리오를 고르는 기준이 궁금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나하고 맞아, 안 맞아가 아니라 재미있나, 재미없나 혹은 매력적인가, 매력적이지 않나를 본다. 작품은 멜로인데 이 사람은 툭툭대고 시비조고 좋아, 매력적이야 그러면 선택한다.
-사진을 찍다가 연기자로 데뷔하는 독특한 경력을 지녔다. 다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지. =공예와 사진, 연기의 공통점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는 거다. 정년퇴직도 없고. 물론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마음은 있다. 나이가 더 들면 암실도 만들고 싶고. 요즘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완전히 꽂혔다. 골동품 폴라로이드 카메라인데 그걸로 찍으면 색감도 질감도 모두 예스럽다. 옛날 물건이라 손을 많이 봐야 한다. 뜯어서 다시 조립하면서 케이스를 만들었고 손잡이도 나무로 깎아서 만들었다.
-공예가 취미라고 들었는데 어떤 물건을 주로 만드나.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거나 노트도 만들고. 그걸 남에게 선물하면 또 너무 행복하다. 어렸을 때 꿈이 자급자족이었다. 음식, 집, 모든 걸 내가 만들어서 쓴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누가 지은 이름이고 어떤 뜻이 있나. =아버님이 지으셨다. 보배 진, 밝을 희. 그때 희자 돌림이라 큰아버님 댁 형들의 이름은 동희, 철희, 영희다. 완전 국어책이다. 바둑이만 있으면 딱이지 않겠나. 당시 일본에 지진이 많이 일어나서 놀림을 많이 받았다.
-<대장금>에는 여전히 고마울 듯하다. =물론 고맙다. 얼굴을 알릴 시간을 당겨준 작품이고 그걸로 동남아쪽에서 큰 인기도 얻었다. 미국에서도 영주권 얻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하라는 편지가 왔다. 그래서 비자나 좀 내달라고. (웃음) 그건 사실 내 드라마가 아니라 이영애씨 드라마다. 그래도 민정호가 장금이 외에 가장 잘 알려진 이유는 워낙 멋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늘 고맙다. 나를 소개한 친구나 캐스팅한 분, 민정호란 가상의 인물에게도.
-차기작은 결정됐는지. =아직. 드라마를 하기로 했는데 다른 친구가 한다고 해서 잘렸다.
-정말 잘렸다고 써도 되나. =마음대로 해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