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생기는 칼럼을 쓰라길래 기다렸다는 듯이 “뭐 그러지요”라고 냉큼 대답했다. 뭘 쓸까… 조바심만 내다가 마감이 코앞이지만 주제도 못 정하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씨네21>에 자주 들락거리는 구아무개가 들러 “김지운 칼럼에 선배 이름 나와요”라며 <씨네21>을 펼쳐보였다. 어디 글 내미는 것이 식은땀 나는 끔찍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김지운 감독의 코를 꿰 사지로 내몰았던 전력이 백일하에 드러났다는 사실에 뜨끔했다.
모름지기 남 괴롭히고 마음 편하게 살기 어렵다더니… 이를 어쩐담. 멀쩡히 한량같이 잘 ‘노는’ 김지운 감독을 꼬드겨 한달에 두번씩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한 건 나의 미필적 고의다. 게다가 궁상맞게 들릴 수도 있는 혼자 사는 남자의 신변잡기까지 떠벌리라고 ‘똥꼬’를 찔러대며 부추기기도 했다. 김지운 감독이 이번엔 내가 코꿴 사실을 알고 자기와 똑같은 낭패를 당해도 싸다며 약을 올려도 속수무책이다.
사실은, 칼럼을 쓰겠다고 수락한 다음날, 거절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핑곗거리 만들 궁리를 했다. 명분도 뚜렷하고 절절해서 오히려 약간의 동정이나 연민까지 끌어낼 수 있는 이유라면 확실할 것 같았다. ‘갑자기 일이 좀 바빠져서.’ ‘아직 영화도 한편 못 만든 처지라.’… 이런 걸로는 약한데…. 좀 터무니없긴 하지만 미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테러사건이라도 좀 일찍 터졌다면 그 충격 때문이라고 억지라도 부렸을 것이다. 그러나, 환청으로 상상한 허 선배(허문영 팀장!)의 목소리를 떠올리곤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니, 미친놈 아이가, 지가 쓰겠다고 해놓고는…. 니 알아서 해라…. 이기(이게) <씨네21>을 물로 보나 짜슥아….” (경상도 억양과 사투리가 약간 섞이고, 아주 느리고 굵지만 나름대로 노래패 출신다운 음색이 살아 있는 목소리로 타이르듯 읽어야 제 맛임!) 되돌아올 허 선배의 뻔한 대답.
그럼 원고료라도 벌지 뭐…. 마음을 다잡고 같이 쓸 파트너까지 나서서 섭외하는 등(이 칼럼은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와 번갈아 쓰게 된다) 전의의 불씨를 살려보지만 갈 길이 구만리같이 아득해 보였다. 소화도 잘 안 되고 만성인 편두통까지 기승을 부린다. 자기가 무슨 ‘붉은 악마’ 응원단인 양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환호할 김지운 감독의 환영마저 눈앞에 어른거린다. 물론 칼럼의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고 해도 김지운 칼럼에 쏟아진 조명발이 워낙 강렬해 후속 필자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경쟁지도 생긴 마당에 판매부수를 ‘유지하고’(더이상 <씨네21>의 판매부수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광고 수주량도 더 늘려보겠다는 요량으로 지면 혁신을 단행했다는데, 밥값도 못할까봐 걱정도 된다.
어차피 쓰기로 한 마당에 한국영화 제작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중에서 더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편파적인’ 목소리를 더하고 싶다. 또 취향이든 감성이든 평균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별종으로 치부되고 소외받는 사람과 이들의 세상살이를 적극 지지하고 옹호할 작정이다.
겨우 몇주 만에 ‘반응이 안 좋아서 필자를 바꾸기로 했다’는 연락을 안 받으면 다행이겠고, 누구(?)처럼 ‘박수 쳤다고 치고 떠난다’는 멋있는 고별사도 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겠다. 칼럼 하나 쓰는데 출사표로 한주를 까먹다니 나도 참 뻔뻔한 필자다…. 휴, 한주 거저먹기 참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