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방만한 속성이 있어 때로 귀나 코를 속이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 속임수의 능력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장인을 두고 흔히 마술사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악착같이 뒤쫓는 대중의 시선 어딘가에 어느새 빈틈을 만들고 그 빈틈이 있어야 할 구상의 설계를 미리 갖고 있으며 그 구상을 도울 기가 막힌 장치나 과학을 알고 있다. 환영을 보았는데 그것이 여전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 없을 경우에는 초자연적 현상이라고 말하게 되지만, 속임수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게 탄복할 만한 것이면 마술사의 장인적 기술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19세기 말 비엔나에 마술사가 있었다. 아이젠하임(에드워드 노튼)은 돌연 등장하자마자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술부터 심령술사나 되어야 가능할 듯한 초자연적 현상까지 고루 펼치며 비엔나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아이젠하임의 쇼를 보던 경감(폴 지아매티)도, 국왕의 자리를 노리는 못된 황태자(루퍼스 스웰)도 그의 마술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 중 하나다. 황태자에게는 약혼녀 소피(제시카 비엘)가 있는데 사실 그녀와 아이젠하임은 어린 시절 첫사랑의 기억을, 계층의 차이를 강조한 어른들에 의해 억지로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다. 아이젠하임의 공연을 계기로 우연히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둘만의 낙원으로 도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소피가 살아 있는 한, 황태자가 있는 한 그러기는 불가능하다.
아이젠하임의 마술쇼를 지상 중계하는 것을 앞세워, 이를테면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들을 앞세워 <일루셔니스트>는 마술의 매혹을 펼친다. 19세기 같으면 마술이라고 불렸을 컴퓨터그래픽의 묘사가 그걸 돕는다. 혹은 숏과 숏 사이에서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는 사실성, 이라는 영화 본래의 속성까지 상기하게 되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이 흥미롭기까지 하다. 에드워드 노튼의 매력적인 연기(라기보다는 본래적인 음성과 표정의 풍부한 매력)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일루셔니스트>는 주인공 아이젠하임과 소피가 난관에 부딪히는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관객의 눈을 속이기 위한 이야기 작업을 걸어온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임수가 관습적이어서 다소 싱겁다. 비유하자면 <일루셔니스트>는 손이 카드를 숨길 때 그 순간의 처리를 그다지 능숙하게 해내지 못한다. 혹은 훌륭한 마술사가 지녀야 할 구상이나 설계 면에서 독창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 영화가 관객을 상대로 걸어놓은 다소 긴 시간 동안의 눈속임 게임 혹은 이야기 게임을 반전이라고 부르든 혹은 다르게 부르든, 그것은 훌륭한 장인적 마술사에게 바칠 만한 탄복을 일으키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