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자로 일한 10여년 동안 지겹도록 많이 쓴 기사가 몇 가지 있다. 불공정 시비에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던 대종상 관련 기사, 영화를 자르고 상영을 막았던 검열 관련 기사, 스크린쿼터 관련 기사, ‘한국영화 위기인가, 기회인가’ 따위의 기사들이다. 이런 기사들이라면 지금도 눈감고 발가락으로 써도 하룻밤에 몇 꼭지는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골이 났다. 이처럼 호기를 부리는 것은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다. 대개 이런 논란이 일면 예견되는 상황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 검열 관련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쟁점과 공방의 논리가 되풀이되고, 뒤이어 수습되는 과정과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요령까지 생겼다. 한 가지 안타까웠던 것은 몇년 사이에 재연된 ‘검열’(심의)과 관련한 일련의 소동에서 영화계의 대응이 참 무기력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동안 헌법재판소(헌재)는 ‘국가기관의 영향력이 미치는 기관에서 사전에 영화의 상영을 원천 봉쇄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요지의 명제를 되풀이해서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헌법이 무슨 친목회 회칙이라도 되는 듯 헌재의 판결 취지를 무색케 하는 얄팍한 후속 조치를 답습해도 영화계는 속수무책이었다.
지난 8월30일 헌재는 <둘 하나 섹스>와 관련해 현행 등급보류 조치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제 완성된 영화는 어떤 형식으로든 상영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말 그대로 완전등급제를 도입하고 제한상영관을 설치하는 것이 대세인 양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영상물등급위원회(등급위)를 그대로 둔 채 제한상영관을 설치한다면, 간단치 않은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물론 가정이지만, 등급위가 어정쩡하게 마뜩잖은 영화는 죄다 제한상영관으로 보내버린다면, 결과적으로 영화가 관객과의 접촉 면이 줄어드는 끔찍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제한상영관 도입에 대해 영화계 내부에서조차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제한상영관을 설치하는 것이 헌재의 판결 취지를 따르면서도 오히려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계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제한상영관을 어떻게 설치하고 운영할 것인가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등급위를 말 그대로 민간자율기구(!)로 재편하는 일이 급선무다. 까닭은, 대통령으로부터 위촉장을 받는 위원회는 민간기구도 자율기구도 될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위원 자리가 벼슬이 되고 위원회가 권력을 갖게 되면 민간자율이라는 말은 한낱 수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제대로 된 민간자율기구라면 독립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영화계 각 단체에서 위촉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고, 유관 문화예술단체, 시민사회단체, 학부모단체 등에서 위원이나 배심원(반드시 청소년들도 등급분류 위원이나 배심원으로 직접 참여시켜야 한다!!!)으로 참여하는 등의 방식도 유력하게 검토해볼 수 있겠다. 또 최초 설립비용과 한시적인 정부 지원은 받되, 수년 내 정부 예산 한푼 안 받고도 수수료와 분담금(제작사, 수입사, 배급사는 물론 극장도 꼭 내야 한다)만으로도 운영할 수 있는 방안도 결국은 영화계에서 풀어야 할 숙제다.
변호사 한 사람이 위헌 판결 받아내면 ‘환영한다’는 성명서 한장 내는 일로 자족한다는 덤터기는 쓰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