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좋지 아니한가>의 제목은 <좋지 아니한家>로 표기됐다. 썩 좋지 못한 가족이라는 뜻과 “이 얼마나 좋은가!”라는 감탄이 홀로그램처럼 겹친 제목인 셈이다. 그처럼 속셈 교묘한 이 영화는 지구를 바라보는 달의 시점에서 눈을 뜬다. 달의 시선이 내리꽂히는 지점은 북반구 남한 어느 지방도시의 이층집. 그 지붕 밑에는 고등학교 영어교사 심창수(천호진)와 아내인 희경(문희경), 용태(유아인)와 용선(황보라) 남매, 그리고 무위도식하는 틈틈이 무협소설을 쓰는 희경의 동생 미경(김혜수)이 살고 있다. 교사로서 보람이 시들해진 창수는 심인성 발기불능 증세를 보인 지 몇해째다. 희경은 욕구불만과 살림의 피로가 겹쳐 퉁명스럽다. 남편의 책상과 아내의 화장대는 정확히 등을 돌려 앉도록 놓여 있다. 밤이면 인터넷 방송 DJ가 되는 소녀 용선은 영화를 가르치는 임시교사 경호(박해일)에게 호기심을 품는다. 미스터리 서클의 지도교사이기도 한 경호는 “쪽팔려서 죽을 수도 있을까요?”라는 학생의 물음에 “충분히 가능하다”는 시원스런 답을 주는 보기 드문 선생님이다. 창수가 친아버지가 아니라고 직감하는 용태는 집안 형편 어려운 동급생 하은(정유미)을 사모하는데 그녀가 원조교제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속이 터진다.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 하은의 이야기와 학교를 둘러싼 일화는 우연히도 <다세포 소녀>를 상기시킨다. 한편 이모 미경은 ‘진짜’ 소설 쓰는 여자 사귀겠다고 떠난 애인에게 받은 상처가 아직 쓰리다. 애견 용구조차 마당의 개집을 비우고 장기간 가출 중이다.
<좋지 아니한가>의 인물들은 각자의 어항 속에서 미지근한 물에 잠겨 있는 듯 보인다. 그들은 고민거리를 옆사람에게 상의하는 대신 심드렁하게 암시하고 돌아눕는다. 아니면 달을 독대하며 읊조린다. 연극이라면 방백이 많았을 인물들이다. 얼핏 연애의 고민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직면한 문제는 삶의 총체적 무의미함에 가깝다. 나는 무엇하러 태어나서 사나? 세상에 뭘 보탤 수 있나? 사람의 몸을 녹여 만들 수 있는 성냥과 비누, 못과 연필심이 몇개인지 나열하는 하은의 대사는 그러한 자문의 극단이다. <좋지 아니한가>의 인물들은 그래서 허무의 장막을 걷어줄 한 줄기 ‘계시’를 내심 기다린다. 작은 신호에도 혹시나 기대를 건다. 하지만 심씨 가족에게 ‘계시’는 꽤나 심술궂은 형태로 찾아온다. 우연히 지하철역에 쓰러진 하은을 도와준 창수의 모습이 동영상으로 퍼져나가면서 ‘원조교제 교사’로 몰린 것이다. 심씨네 식구들은 불명예에 의해 갑자기 한 두름으로 꿰이고, 남들의 돌팔매를 방어하다 자기들이 가족임을 생각해낸다. 어렴풋이.
<좋지 아니한가>는 실용적인 영화다. 작가와 감독은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비결은 아는 체도 무시도 않는 적절한 원근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주장의 근거를, 과하게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않으며 동행을 지속하는 달과 지구의 관계에서 찾는다. 정윤철 감독의 장편 전작 <말아톤>도 돌아보면, 결국 마냥 부둥켜안고 있던 초원이와 엄마가 어떻게 조금씩 멀어질 수 있게 됐나를 관찰한 영화였다. 비유 대상을 천체의 움직임과 새끼를 자립시키는 동물의 행태에서 찾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정윤철 감독은 인간관계의 불행이 자연의 섭리와 멀어진 데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가족애와 가족 이기주의를 천륜의 이름으로 절대화하는 것은, 알고 보면 자연을 거스르는 노릇이라고 보는 것이다. <좋지 아니한가>에서 달은 인물들의 문제를 그 빛에 비추어 답을 주는 관찰자이며 하나의 캐릭터다. 배우들의 연기는 조화롭다. 천호진은 <주먹이 운다> 이후 가장 편안하게 이완된 모습이고, 문희경은 인물 중 가장 폭넓은 감정을 표현하며 영화의 정서를 주도한다. 부루퉁하게 달을 올려다보는 황보라의 얼굴은 영화를 대변하는 표정이 되기에 적절하고, 기능 뚜렷한 조연을 맡은 김혜수와 박해일은 스스로 즐기는 티가 역력하다.
문어발식으로 전개되는 서사구조를 가진 <좋지 아니한가>는 관객의 긴장을 놓칠 위험을 타고난 영화다. 그러나 남의 영화 예고편을 제작할 만큼 편집의 귀재로 알려진 정윤철 감독과 함성원 기사의 편집은 통상보다 한 박자를 줄인 커팅 타이밍으로 관객의 주의를 붙든 채 장면의 바늘코를 이어가는 전략을 쓴다. <좋지 아니한가>의 미진한 구석은 영화의 선명한 메시지가, 인물들 각자의 경험과 밀착되어 하나로 종합되기보다 내레이션과 비유를 통해 주로 전달된다는 점이다. 또한 심씨 가족이 아빠를 모욕하는 이웃 전체를 상대로 천변에서 대판 싸움을 벌이는 클라이맥스도 “혼자가 아니라서 좋다”는 결론의 진의와 어긋나는 인상이라 석연치 않다.
이제 두 번째 장편을 완성했을 뿐이지만 정윤철 감독은 메시지를 다루는 태도에 있어서, 유능한 전령이자 아이디어 많은 요리사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단편 <기념촬영>은 성수대교 붕괴로 잃은 친구들을 기억 속에서 놓지 못하는 여성의 환각을 담았고, 또 다른 단편 <동면>은 IMF 이후의 궁핍함을 미래사회의 출산제도를 빌려 그린 SF였다. <말아톤>은 세렝게티 초원으로 주인공을 데려다주었고 인권영화 <잠수왕 무하마드>는 고단한 외국인 노동자가 몸을 담근 대중탕을 타이의 고향 바다로 바꿔놓았으며 <좋지 아니한가>는 달의 이면까지 날아간다. 정윤철은 주제의 영양소를 파괴하지 않은 채 관객의 소화흡수를 도울 수 있다면 우의와 판타지를 주저없이 채택하는 순발력있는 이야기꾼의 면모를 확실히 했다. 동물, 외계의 존재, 심지어 죽은 자의 시선에 이입해 색다른 앵글로 현실을 보는 그의 세계는 어린이의 꿈속처럼 광활하며 그 기슭에는 연민이 흐른다. 더불어 사는 법에 대한 상상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정윤철 영화의 주제가 될 듯하다. <좋지 아니한가>는 할 말이 분명하고, 내러티브 대중영화 안에서 그것을 풀어낼 참신한 화술을 두고두고 완성해갈 감독이 도전한 고난도의 연습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