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은 사랑과 이념을 저울에 올려놓고 이들의 무게를 가늠하는 영화다. 처음에는 화해의 가능성이 있었고 지금이라면 양립할 수도 있을 두 가치는 짙어가는 냉전의 안개 속에서 시기하고 반목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서로를 향해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한 채 영원히 안녕을 고하고 만다. 이념을 선택한 남자는 어두운 방에서 피아노를 치며 옛 시간을 그리워하겠지만 그를 사랑하나 그의 이념을 체화하지는 못한 여자는 눈부신 햇살 아래 아이들과 뛰놀며 또 다른 미래를 꿈꿀 것이다.
이국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이곳은 베이루트. 미국인 화가 샐리 타일러(샤론 스톤)는 오랜 결혼 생활과 안온한 일상이 지루하다. 지인들의 소개로 영국 정보부 출신의 <런던타임스> 기자 레오 카우필드(루퍼트 에버렛)와 마주한 샐리는 그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고 결국 이혼도 불사한 채 그와 결합한다. 하지만 이토록 불완전한 세상에 완벽한 사랑이란 없는 법. 행복하기 그지없던 어느 날 레오는 아무런 설명 없이 가족을 떠나고 홀로 남은 샐리는 정신없이 남편의 행방을 쫓는다. 세상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이중스파이로 몰아세우는 가운데 샐리는 레오의 편지를 받고 그가 있다는 러시아에 발을 들이기로 결심한다.
초반에는 멜로의 분위기가 그득하던 <실종>은 레오가 사라진 뒤 스릴러로 방향을 전환한다. 레오의 정체가 점차 모호해질수록 샐리는 매일 조금씩 덧붙여온 이 남자와의 사랑이 실은 허상이 아닐까 의심하며 괴로워한다. 베이루트에서 런던, 뉴욕, 모스크바까지 레오를 만나기 위해 종종걸음치던 샐리가 드디어 레오에게 도달하는 순간 스릴러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올곧이 사랑 혹은 이념을 사이에 둔 선택의 순간만이 남는다. 흑백 TV에서 흘러나오는 셰익스피어의 글귀를 따라 읊조리는 레오는 분명 빛바랜 종이꽃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 홀로 박제된 과거의 존재다. 30년대에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그는 공산주의의 장밋빛 주장에 매달려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있다. “샐리는 다시는 남편을 보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무척이나 잔인할 이 영화의 마지막이 그렇게 씁쓸하지 않은 건 레오의 음습한 기침소리보다 신념처럼 사랑을 우러르던 샐리의 웃음이 더욱 강렬하게 와닿기 때문이다. 샤론 스톤이 남편의 자취를 더듬으며 거침없이 러시아 국경을 넘나드는 샐리 역을 맡아 고군분투하지만 강렬한 아름다움도 카리스마도 스러진 모습이 다소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