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김혜리가 만난 사람
날마다 생의 한가운데, 배우 문소리
김혜리 사진 이혜정 2007-02-18

문소리를- 배우로서- 안다고 생각했다. 무리도 아니다. 그녀는 스크린이 엄폐물 없는 벌판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우친 조숙한 배우다. 문소리는 감추기보다 드러내는 기술, 가장 정직하게 표현하는 방법부터 터득하는 게 순리라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오아시스> <바람난 가족> <사랑해, 말순씨>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연기는, 작품 해석이 철저하고 기교가 튼튼한 연주였다. 그래서 소박하되, 화려했다. 지난해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에서 문소리는 떡볶이 가게를 하며 철없는 동생(엄태웅)이 저지른 일을 치다꺼리하는 누이 미라로 분했다. 사람들은 오고 가는데, 미라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녀는 달처럼 남들이 던진 빛을 받아 반사할 뿐이다. 문소리의 친구이기도 한 김태용 감독은, 에너지 많은 배우가 에너지를 안 쓰고 버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의 이자벨 위페르나 <미스틱 리버>의 로라 리니처럼,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인물의 존재감을 요구하며 감독은 문소리에게 말했다. “소리씨한테도 일종의 거짓말처럼 그런 게 필요해.” 보이지 않게 성을 내다가 보일 듯 말 듯 누그러지기를 반복하는 미라의 눈치를 살피느라 나는 눈을 비비고 잔뜩 귀를 세웠다. 그건 생전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느끼는 긴장이었다. 개봉을 기다리는 <사과>를 포함해 여덟편의 장편영화를 찍은 문소리는, 알고 보니 아직도 미지의 배우였다.

문소리는- 배우로서-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네 비평은 투박해서, 능란한 배우에게 연기 잘한다고 칭찬할 뿐 어떻게 잘한다고는 좀처럼 말해주지 않는다. 고작 돌아오는 평가가 미모냐 연기력이냐 구분에서 멈추기 쉬운 여배우의 상황은 더 나쁘다. 그런데 문소리는 비평보다 멋진 주석을 연기에 툭툭 달 줄 안다. <오아시스>를 찍고 그녀는 “(휠체어의) 낮은 높이에서 보는 세상은 다르다. 양쪽 눈의 초점이 달리해서 세상을 보면 큰 사람 안에 작은 사람이 보인다”고 말했다. <바람난 가족>에서는 섹스신 촬영의 부담에 대해서 “강간장면도 아니고, 나의 공간인 가장 편하고 즐거운 곳에서 하는 일인데 내가 거기서 울고 그러면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쩜 네 딸은 엄마 속 뒤집는 영화만 하니?”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장애를 가진 여자, 바람 피우는 여자, 가족을 먹여살리는 여자, 거짓말하는 여자를 연기하며 문소리는 ‘예쁘거나 혹은 순수하거나’로 요약되는 한국 여배우들에게 주어진 ‘부덕’(婦德)의 속박을 서둘러 풀어버렸다. 한편 그녀와 일했던 남자 감독들은 한국 남성의 못난 구석을 가차없이 까발리는 여성 캐릭터를 문소리에게 맡기길 즐겼다. 남자에게 환상보다 경종이 되는 여자. 뒤집어보면 이는 곧 다른 여배우들이 문소리가 연기한 역할을 어려워한 까닭일 수 있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문소리는 한국영화의 공기를 점검하는 탄광의 카나리아로 불리기도 한다. 용기있고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질 때 그녀의 커리어도 꽃필 거라는 예측에서다. 아무튼 문소리는 지금까지 출연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부분 살아남았다. 살아남아 방바닥을 싹싹 걸레질하고 겨울을 날 김장을 담갔다. <사랑해, 말순씨>에서는 심지어 죽은 뒤에도 아들의 꿈속으로 돌아와 춤을 추었다.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문소리는 문득 생각난 듯 결혼을 했다. 장준환 감독(<지구를 지켜라!>)과 애인이 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그녀는 압도적으로 행복해 보였다. 발걸음마다 꽃가루가 날리고 귀걸이는 종소리를 냈다. 갸름한 손가락에 감긴 가느다란 결혼반지는 정성껏 놓은 자수 같았다. 인터뷰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손님이 한명 더 있었다. 문소리가 방금 한 말을 사랑하는 사람의 귀로 다시 들어보고 빠진 것을 부연하는 것처럼 보일 때 나는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안정감과 에너지로 머리끝까지 충전된 문소리는 1년간 떠났던 촬영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조만간 몸살이 날 태세였다. 말로만 듣던 화양연화(花樣年華)가 눈앞에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문소리씨와 가까운 분들께 도움말을 구했는데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사귀는 남자친구가 누구인 줄도 몰랐으니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었나 봐요”라며 토라진 기색들이던데요. =다들 등 돌리면 등을 부여잡고 술을 들이부으면서라도 붙잡아야죠. (웃음) 올해의 남녀 최고 연기상을 주겠다는 둥 아주 혼났어요. 전 여름까지도 제가 결혼할 줄 몰랐거든요. 장준환 감독님도 독신주의나 마찬가지였는데, 우리 식구들을 만나고 나서 쉽게 가족처럼 되더라고요. 저도 이렇게 편하게 가족이 된다면 어렵지 않겠다 싶었어요.

-가족들만의 식을 치렀잖아요. 사회를 맡은 이금희 아나운서님 전언에 따르면 두분이 직접 쓴 편지를 낭독한 순서가 감동적이었다는데, 예식의 내용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나봐요. =사실 그 편지는 이금희 언니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는 것도 참 좋더라”고 넌지시 얘기하기에 안 쓰면 사회 거절할까봐 썼는걸요? 결혼식 전날 둘이서 등 돌리고 앉아 밤새 끙끙거리고 편지 쓰다가 의 상할 뻔했어요. “이걸 꼭 써야 해?” 처음으로 후회하는 서로의 눈빛을 약간 느끼면서. (웃음) 닭살 돋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막상 읽다보니 감독님 울컥해서 눈물 흘리시고 하객들도 같이 울며 박수쳐주셨어요. 어떻게 살아가자는 말 속의 진심이 통했는지. 어머, 제가 방금 관객이라 그랬죠?

-하객이라고 하셨어요. (웃음) 데뷔 뒤 줄곧 혼자 일하다가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돼 일한 지 3년째입니다. 실생활에서 느끼는 차이가 궁금해요. =훗날 다시 혼자 일하더라도 매니지먼트를 일단 경험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시나리오를 거절할 때나 제가 묻기에 애매모호한 문제가 있을 때 훨씬 편하죠. 저는 신경을 쓰면 한없이 쓰고, 안 쓰면 아예 덮어버리는 성격이거든요. 그래도 아직 제게 연락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일 이야기를 직접 할 때도 종종 있어요.

-배우로서 장기적으로 나아갈 방향에 소속사가 끼치는 영향력은 없나요? =제 의견을 굉장히 존중받아요. 매니지먼트 계약할 때 많은 회사를 만났는데 지금의 소속사가 규모나 지명도에 비해 해주겠다는 것이 가장 적았어요. 그렇지만 큰 혜택을 받아봐야 내가 돈을 많이 벌어주기도 힘들고, 어떤 식으로 돈을 벌어줘야 하는지 답은 뻔한데, 중요한 것은 지금의 일하는 태도를 크게 바꾸지 않아도 되는 회사라는 점이라고 봤어요. 그러고보니 계약할 때 대표님이 구두로 조심스럽게 “저, 3년 안에 결혼은 안 하셨으면…” 그랬네요. 당시 제 반응은 “하하, 제가 어떻게 3년 안에 결혼을! 말도 안 돼요. 걱정 붙들어매세요”였는데…. (웃음)

본래 저는 배우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성격이에요

-인터뷰를 보면 어머니는 물론 할머니를 부지중에 언급하세요. 사이가 돈독하신가봐요. 어린이들과도 금세 친해지는 편이죠? 여러 연령층과 무리없이 말이 통하나요? =본래 저는 배우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성격이에요. 아기 때부터 집에 낯선 사람이 오질 못했어요. 가스점검만 와도 자지러지고, 엄마랑 외출했다가 택시 기사님이 “어디로 모실까요?”라고 물으면 곧장 울음을 터뜨렸대요. 지금은 많이 고쳤지만 배우가 된 뒤에도 한동안 제작자, 감독을 만나도 “안녕하세요?” 한마디하고 침묵을 지켜서 30분 뒤에야 그분이 “혹시, 저희 영화 보셨어요?”라고 묻는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아이나 노인은 처음 봐도 낯을 안 가려요. 내가 좋아하는 만큼 오해하지 않고 좋아해주고 친절이 다른 식으로 해석되지 않아서 안심이 돼요. 반면 또래들은 내가 친구를 여기서 더 만들어봐야 잘해줄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머뭇거리죠.

-“문씨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작은(小) 아이”라는 뜻이 이름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굉장히 금실 좋은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귀염둥이였겠다 싶었어요. 어느 집이나 부모님들이 되풀이해서 들려주는 탄생 설화 같은 후일담이 있는데, 문소리씨 경우는 어때요? =지금까지도 다투시는 걸 보면 두분의 의가 좋은 거겠죠? (웃음) 태몽, 제반 정황, 동네 어르신들의 예상에 따르면 저는 틀림없는 아들이었대요. 그런데 결국 난산 끝에 아주 작게 태어나서 딸 아들 구별할 경황도 없이 수혈부터 받았죠. 고생하며 태어나서인지 전 4살 이전 얼굴과 이후 얼굴이 굉장히 달라요. 쌍꺼풀도 콧대도 늦게 생겼어요. 어려서는 너무 못생겨서 아빠가 신생아실에서 애가 바뀌었다는 의심까지 했대요. 그런데 유치원 갈 무렵에는, 믿지 않으시겠지만, 얼굴에 큰 눈만 동그래서 사람들이 “유지인 딸”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최민식씨가 주연한 연극 <에쿠우스>를 영향받은 작품으로 꼽으신 적이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제일 좋았던 작품보다 그맘때 제가 붙들고 있던 뭔가를 확 깨버리는 요소를 가진 작품을 두고두고 돌아보게 되던데요. =고등학교 올라가던 겨울이었어요. 친구한테 이끌려 보러 갔는데, 내 안에 터부로 돼 있던 것들이 깨졌고, 뭐랄까 굉장히 에로틱하고 강렬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앨런의 정신병도 이해가 가면서 눈물이 떨어졌어요. 그때까지 영화도 학교 단체 관람 말고 가본 적이 없었는데 제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만난 거죠.

-<박하사탕>이나 <사랑해, 말순씨> 때문인지 문소리씨는 어쩐지 1980년대를 연상하게 만드는 배우예요. 정작 본인의 80년대는 어땠나요? 햇수로 따지면 고향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하고 여러 변화를 겪은 시기였을 것 같은데요. =80년대의 느낌은 <박하사탕> 영향이 큰 것 같아요. 1981년에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된 해였죠. 아웅산 테러 등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업도 하지 않고 교실에 놓인 TV를 보며 반공교육 받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1986년에 서울 잠실의 석촌호수 앞 동네로 이사 왔는데 당시 잠실은 지금보다 빈부격차가 더 심했어요. 그러다 일원동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죠. 양재천변을 혼자 걷는 일을 몹시 좋아해서 일원동을 떠날 때 서운했죠.

-걷는 걸 좋아하시죠? 걷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대학 다닐 때도 카페에 앉아 대화하는 건 좋아하지 않았어요. 데이트를 해도 학교(성균관대) 뒤쪽으로 감사원, 삼청공원을 넘어가는 길로 산책하거나 창경궁, 비원을 지나 경복궁, 광화문까지 많이 걸어다녔죠. 우선 저는 뭘 보는 일을 좋아해요. 걸으면 풍경을 볼 수 있잖아요. 대학 다닐 때 63-1번 시내버스를 타면 학교까지 1시간가량 걸렸는데 그맘때 늘 같이 버스를 타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은 보지 않고 언제나 창밖만 보고 있으니까 “갓 상경한 애처럼 늘 똑같은 거리를 뭘 그리 열심히 보냐”고 묻더라고요. “똑같지 않아”라고 대답한 기억이 나요.

-그럼 혹시 한글도 간판 읽다가 뗐나요? =어떻게 알았어요? 버스를 타면, 모르는 글자는 뭐냐고 묻고 아는 글자는 읽어대며 뜻이 뭐냐고 시끄럽게 캐물어서 나중엔 엄마, 아빠가 입을 틀어막아야 했대요. (웃음)

<오아시스>를 기점으로 내게도 어려움과 어둠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죠

-배우가 되기 전인 1997년 8월23일자 <한겨레>에 문소리씨 기사가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국민승리21 추진위원회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소개됐던데요. =선배가 밥 사준다고 해서 사무실에 들렀는데 사진이 찍힌 거예요. 아버지가 어떻게 찾아내셨는지 그걸 보고 “너 이러고 돌아다니냐?”며 한소리하셨죠.

-아까 4살을 기점으로 급변한 외모도 말씀하셨지만, 문소리씨가 걸어온 길을 보면 참 국면 전환이 선명한 인생이 아닌가 싶어요. <해피투게더 프렌즈>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셨을 때 보니까 초등학교 친구들은 문소리씨를 예쁘고 새침한 친구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대학교 때는 털털한 운동권 여학생이었잖아요? 배우가 된 뒤에도 <박하사탕>과 <오아시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만큼 달라진 느낌이었고 <바람난 가족> <사랑해, 말순씨>에서도 연기의 변모가 아니라 사람이 어딘가 바뀌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박하사탕>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혼자 생각하는 그림은 이랬어요. “나는 약하게 태어나 부모님이 곱게 키우셨고 양가를 통틀어 첫아이라 친척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콤플렉스 같은 것이 없고 밝고 건강하다. 그리고 그 밝음이 주변 사람에게도 전해진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님 만나고 나서 자신에 대해 정확하고 신랄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오아시스>를 기점으로 내게도 어려움과 어둠이 있다는 것을 상기했죠. 사실 맏딸이라 어른들 걱정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입장이었거든요. 12살, 10살 어린 친척 동생들을 중학교 때 업어 키우면서 그 나이에도 “속이 썩는다”는 것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서울로 이사 왔을 때는 부산의 친구와 친척들이 보고 싶어 몹시 앓기도 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연습장에 “그리움은 이런 거다. 나는 이제 알았다”고 썼던 기억이 나요. 아프고 나쁜 기억들도 거기에 내가 지지만 않는다면 남겨둘 필요가 있더라고요. 나는 배우니까.

-판소리를 배우셨죠. 현대인들이 사는 모습을 판소리로 창작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인상이 깊었어요. =그런 생각은 판소리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하지만, 사실 기존 다섯 바탕(마당?)(<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춘향가> <수궁가>)만 공부하기에도 평생이 모자라죠. 제가 인복이 많은 게, 소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던 중에 우연히 종로를 걷다가 어느 옥탑방에서 수궁가 인간문화재 남해성 선생님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됐어요. 이번 결혼식 때 지리산에 계신 선생님께 가족끼리 치른다고 연락드렸더니 그 좋으신 목청으로 “그럼 어쩌란 말이냐! 니가 시집을 간다는데! 어이구 독한 년” 하고 귀청 떨어지게 호통을 치신 다음 서울 제자들을 보내 축가를 선물해주셨어요. 선생님은 제 영화를 모조리 극장가서 보셨는데 <오아시스> 때는 극중 제 모습을 보고 속이 상해 옆사람을 붙잡고 ‘자가 저런 애가 아니요’ 하면서 우셨대요.

-저는 영화를 보면서 문소리씨의 몸매나 그 움직임에 늘 감탄합니다. 본인의 몸이 예쁘고 유연하다는 것은 언제 자각했나요? =중·고등학교 때 대중탕에 갈 때면 아줌마들에게 그런 얘기를 듣긴 했어요. 아버지는 뼈대가 가늘고 어머니는 팔다리가 기세요. 어릴 때는 뼈가 굉장히 약해서 팔만 잡으면 빠지는 습관성 탈골이었죠. 과자 대신 칼슘제, 멸치, 미역, 다시마를 달고 살았으니까. 그런데 약하면 유연한 건지 2개월간 발레를 배울 때 꺾으니까 다 꺾어지고 며칠 만에 다리도 금방 찢어지더라고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제작한 오가원 프로듀서님은 문소리씨가 몸의 표현력이 좋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배우라서 코미디영화, 액션영화에 도전하면 결과가 멋질 거라고 상상을 하시더라고요. =저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코미디 시나리오는 몇편을 거절했더니 더 뜸해졌어요. 한때는 형사물도 제의가 있었는데 요즘은 안 들어오네요. 거절했던 이유는 기존의 남성 형사물에서 성별만 바꾼 시나리오라고 봤기 때문인데요. 여성 형사가 관객에게 주는 재미가 그저 여자가 남자처럼 행동하는 데에서 비롯되거나 여자니까 당연히 아이의 감정을 잘 살핀다거나 하는 단순한 설정에서 온다면 부족하잖아요. 그러나 좋은 시나리오가 나온다면 흥미로울 것 같아요.

엄마가 저는 세상 누구 말도 안 듣고 영화감독 말만 듣는데요

-창의적인 일에 재능이 있는 남자, 천재적 풍모가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에서 보니 예전 남자친구 중에도 예술에 종사하는 분이 있었던 같고요. =내가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그 마음이 오래가요. 물질적인 성공이나 출세에 대해서는 제가 그리 훌륭한 가치라고 느끼지 못하나봐요. 그런데 사람이 다 장단점이 있다고, (망설인다) 이건 얘기하면 험담인가? (웃음) 장준환 감독님이 아이디어는 많은데, 일이 닥치면 예컨대 이사를 한다고 하면 엄청난 짐을 쌓아놓고 ‘망연자실’하는 과예요. 분류 방법 고민하다 반나절을 보내는데 저 같으면 그동안 절반은 정리하거든요? 신혼여행 가서도 제가 커다란 트렁크를 엎어서 확확 정리하고 있으면 저쪽에서 카메라 렌즈를 꼼꼼히 닦고 계세요. “지금 이걸 잘 닦아줘야 해요” 하면서. 그럼 제가 “저기, 지금 꼭이오?”(예쁜 목소리로) 하고 묻다가 “예, 얼른 닦으세요” 그러죠. 제가 큰일을 하려고 들면 자기가 하겠다고 말리는데 마음만 감사히 받고 그냥 제가 해요. (웃음)

-그렇다고 소리 높여 이래라저래라 쉽게 말하는 사람은 싫잖아요. =제가 누구에게 이래라저래라 소리를 들은 경험이 없어요. 맏딸이라 공부도 알아서 했고 선생님들한테 닦달당한 적 없고. 대학에서도 제가 나온 교육학과는 착한 남자, 야무진 여자들이 많아서 위계질서가 딱딱하지 않았고 그러다 극단에 있다가 영화계로 왔으니 그런 경험이 없죠. 누가 명령조로 말하면 “왜 저런 식으로 이야기할까?” 싶어요. 엄마가 저는 세상 누구 말도 안 듣고 영화감독 말만 듣는데요. 그래서 감독한테 시집을 간 건지. (웃음)

-배우의 길이 내 길이 맞나 하는 갈등을 끝내고 어떻게 이 일을 잘할까만 고민하면 되겠다고 마음을 정리한 시점이 언제인가요? =우선 시작했으니 제대로 연기를 할 때까지는 해봐야 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변함이 없었어요. 하지만 정 안 된다면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으려고 했죠.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배우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거니까. <바람난 가족> 끝나고 개봉까지 오랜 시간 기다리며 정말 다른 일로 먹고살아야 할까 고민했는데, <효자동 이발사>를 택하면서 조연도 하고 여럿이 어우러진 가운데 연기해보자고 생각했으니 아마 그 즈음이 아니었나 싶네요.

-<박하사탕>의 순임이 얼굴을 보면 지금 문소리씨와 다른 사람 같아요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께 가장 좋아하는 문소리씨 얼굴을 물었더니 그 수줍은 얼굴이라고 하시더군요. 순정적인 수줍음이 아니라 할 말을 안에 담고 있으면서 짓는 수줍은 표정이 좋다고. 지금의 얼굴은 많이 단호해졌어요.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얼굴이 변하는데, 제가 배우하는 동안 많이 못되게 살았나봐요. (웃음) <오아시스>를 하면서 턱관절이 많이 틀어지고 부었고, 치료과정에서도 얼굴이 약간씩 변형됐어요. TV에서 <박하사탕>을 하기에 이젠 볼 수 있겠다고 봤는데,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나를 담은 얼굴이라 좋았어요. 결혼하고 나서 집에 있는 그분은 제게 종종 순임이 얼굴이 보인다면서 좋아하세요. 아직도 남아 있구나 싶어 저도 반갑죠.

-호감과 신뢰를 별개로 여기나요?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과도 쉽게 신뢰를 유지하며 작업하나요? =예전에는 나와 다른 사람을 굉장히 무서워했는데, 이제는 사람이 다르다고 해서 나쁜 것도 크게 두려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어요. 말하는 방법과 생각이 다를 뿐이지. 화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남의 말을 받아들일 때 90%를 말하는 태도와 표정에서 받아들이고 정작 내용은 10%밖에 차지하지 않는데요.

-음식을 먹을 때 후각이 차지한다는 비중과 비슷한 건가요? =하지만 90%라니 놀랍죠? 2∼3년 전만 해도 현장에서 저는 의사를 전달하고 싶은 나머지 말하는 태도나 상대의 상황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우린 공동의 목표를 이미 갖고 있고 서로 피땀 흘리는 걸 보고 있으니 당연히 이해될 줄 알았죠. 그런데 내용이 100% 옳다 해도 듣는 이의 마음이 더 중요한 거였어요. 영화 찍는 데 100% 맞는 일이 또 얼마나 되겠어요? 영화를 잘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 마음에 상처주지 않는 거잖아요. 한번 다치면 일단 상처가 쓰리니까 말의 내용이 들리지도 않죠.

인물의 디테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다가올 때가 많아요

-<오아시스>로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감독들이 칭찬은 하면서 정작 영화 찍을 때 안 불러준다고 살짝 불평하신 것을 봤는데, “저 연기도 내게 맡기면 썩 잘해낼 텐데” 싶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 영화 촬영 중에는 다른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해요. 영화가 너무 좋아도 돌아와서 자꾸 생각나고, 그렇지 못해도 제게 도움이 안 되니까요. 경험상 “당신이 꼭 필요하다”는 영화를 할 때가 가장 결과가 좋아요. 물론 대부분 감독들은 당신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을 하시죠. 여러 배우한테요. (웃음) 뭐, 여럿을 염두에 두고 쓸 수도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꼭 내가 필요하다는 직감이 오는 영화가 있어요. 저는 긍정적 출발이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해요.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든데, “다들 내가 못할 줄 알았지? 깜짝 놀라게 해주겠어” 하는 오기로 이길 수 있는 세상이면 제가 벌써 여왕 됐죠.

-다른 여배우들이 마다할 만한 배역에 용감하게 도장 찍을 때마다 영화 만들고 한국을 뜬다는 농담도 했는데, 다른 땅에서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도 있어요? =그냥 떠나 접시 닦고 살아도 뭔가 다른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희망은 갖고 있어요. 내가 너무 긍정적인가? 미국에서 식당하는 아는 분도 있고(웃음), 영국에 가 공부를 더 해볼까 한 적도 있고. 사실 대학 졸업 뒤 서울예대 입시를 보고 <박하사탕> 오디션에 응했는데 둘 다 떨어지면 미국 가서 사이코드라마나 음악치료를 공부해보려는 마음도 있었어요.

-<바람난 가족>에서 아들을 잃고 한참을 무덤에서 통곡하는 장면이 있고 <사랑해, 말순씨>에는 자기 병이 깊어지기 전에 아이에게 밥물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대목이 있잖아요. 엄마 역을 연기하면서 마음속에 대상을 세워두고 감정을 만들었을 텐데 그러다보니 실제로 아이를 가지면 오랫동안 알던 존재를 만난 듯한 자연스런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에서 자꾸 아들을 만났기 때문에 아기를 낳으면 아들일 것 같은 기분은 들어요. 아이를 낳는 것은 대단하고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대체로 뭘 생산하며 살지 못하잖아요? 하루 일과를 따져봐도 온통 소비고, 여가를 즐긴다고 해도 결국 소비인데 그거 소비하려고 그렇게 힘들게 일한다는 것이 의아할 때조차 있어요. 그런 면에서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건 굉장한 일이죠. 조금 무섭기도 해요. 제가 많이 집착해서 아이도 저도 힘들어질까봐. 일을 열심히 하며 함께 있는 시간은 적더라도 심리적으로 친밀감을 유지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이른 걱정이네요! 연애를 할 때도 내가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정신이 번쩍 나면서 “잠깐만, 저 집에 갈래요” 한 적이 있어요.

-<사랑해, 말순씨>에서 아예 밀어버린 적도 있지만 문소리씨 눈썹은 약간 비대칭이면서 감정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에요. =<태왕사신기>를 찍는데 TV는 클로즈업이 많고 요즘 TV화면이 커진데다가 슬로모션도 많아서 제 눈썹이 거슬린다고 지적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배우들이 TV에서 가만히 고개 돌려 눈물만 뚝 떨어뜨리는 연기를 하나 봐요. 영화 8편을 찍는 동안 없었던 일이라 굉장히 당황했죠. 어떻게 눈썹을 안 움직이며 표정을 지을지, 보톡스 맞는 게 도움 되는 연기도 있겠구나 싶었죠. (웃음) 눈썹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고 있다가 촬영에 들어가요.

-연기를 하는 공간이나 의상, 둘러싼 스탭들의 집중이 연기의 변수가 될 때가 많을 거예요. <바람난 가족>의 평창동 고급 주택이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 나온 촉감 좋아보이는 옷이 기억나는데요. =그런 경험 많죠. <태왕사신기>에서는 CG가 많아서 제가 ‘파란 나라’라고 부르는 크로마키 촬영을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먼지만 앞에 두고 연기하려면 앞이 깜깜해요. <오아시스> 때는 밥도 한공주의 방 전기장판 위에서 먹었고, <사랑해, 말순씨> 현장에 가면 극중 제가 사는 집 골방에 들어가 아역 배우들과 군고구마 까먹고 한글놀이하며 놀았어요. <효자동 이발사>는 전라도 봉동, 익산 지방에서 찍었는데 극중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도 분장도 하고 동네를 막 돌아다녔어요. 동네 슈퍼에 갔더니 주인 할머니께서 “쩌기, 파마 어디서 했는가?” 묻더라고요. 서울서 했다니까 “서울서는 파마가 참 잘 나오네” 하시면서 “거기도 젊었을 때는 한 인물 했겄는디?” 그러셔서 어찌나 웃었는지. (웃음)

-관객으로서 문소리씨 연기에 가장 감탄한 영화는 <가족의 탄생>이었어요. 내성적인 누나 미라 역으로 분한 모습이 저 사람이 누군가 싶을 만큼 낯설었어요. 입도 크게 안 벌리는 말투부터 동생이 화를 낼 때 어쩔 줄 몰라하면서 얼굴을 가릴 때 손끝에 들어간 힘까지. 내가 아직 저 배우를 모르는구나 싶었어요. =김태용 감독님이 “소리씨는 이러저러할 때가 예쁘다. 그걸 담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이 주로 제가 말 안 하고 있을 때, 눈만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고 당황해서 상대를 쳐다보고 있을 때, 조그맣게 구시렁거릴 때예요. 고두심 선생님, 엄태웅씨가 목소리가 좋으니까 제 음성은 일부러 작게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믹싱 결과 음량보다 높은 톤이 부각된 것 같아 아쉽죠. 인물의 디테일은 처음부터 정하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캐릭터가 다가올 때가 많아요. 이창동 감독님 표현대로 문고리를 잡는 거죠. 문고리 잡고 들어가서 방이 뜨뜻하면 온기를 느끼고 창문을 열어 휑하면 그것도 느껴보고.

-“여배우는 연기 좀 한다, 예쁘다 말고 평가하는 기준이 없다”고 지적하신 적이 있어요. =남자들은 농담 반 진담 반 “나 원래 이런 놈이야”라는 말을 잘 하지만 여자들은 그런 말을 잘 안 하잖아요. 남자는 한량도 있고 바람둥이, 풍운아 많지만 그게 스타일이나 캐릭터로 여겨져요. 그러나 여배우에겐 그게 용납이 안 돼죠. 남자는 “저 게이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레즈비언의 커밍아웃은 더 드물고 남자 연예인은 “저 실은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활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여자는 그러기 어렵죠. 물론 남자도 가정적이고 성실한 이미지로 점수 얻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데 저는 다른 배우들이 어떤지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보통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여야지 다른 배우에게 관심을 두면 제게 도움이 안 돼요.

-휴대폰 줄이 어딘가 여배우 물건답네요. =일본 여행을 갔다가 오락실의 인형뽑기 상자에서 뽑았어요. 내가 이렇게 한번 노리면 끝을 봐요. 한쌍이라 남자 캐릭터도 있는데 그것도 단숨에 뽑았죠. 일본 만화에 나오는 도둑 커플이래요. 말하자면 부부사기단이죠. 남자 인형은 장준환 감독님 전화에 달려 있어요. (웃음)

배우는 이유없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스스로 가장 비판적이어야 하죠

-영화의 마지막까지 남아 삶을 이어가는 인물을 맡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인지 실제로도 트미한 사람들의 뒷감당을 할 것 같은 인상이 있어요. =그러고보니 진짜, 잘 살아남았네. 글쎄요. 누가 내게 의논을 해오면 “속상하겠다 어떡하니” 하면서 손잡고 같이 울어주기보다 “자, 지금 이렇게 됐지? 이건 이래서 네가 잘못한 것이고 그건 그러니까 일단은 여기까지 하자. 감이 딱 왔어” 하는 식으로 대화해요. 정 떨어진다는 사람도 있죠. 남자들이 문제해결형이 많고 여자들이 감정공유형이 많다는데 저는 문제해결형 대화를 해요. 반면 제게 고민이 있을 때는 스스로 정리한 다음 극소수 사람에게 의견을 구하지만 좀처럼 안 흔들리죠.

-<태왕사신기> 촬영 뒤 올해의 계획은 아직인가요? =지난해보다 영화시장이 어렵다는데, 저는 같이 해보자는 분들이 좀더 많아졌어요. 드라마가 끝나는 시점이 정해져야 계약을 할 수 있겠죠. 지난 한해 영화를 안 찍었더니 남들 촬영현장에 가면 많이 부러워요. 저는 현장에 있을 때 잠도 제일 잘 자고 밥맛도 제일 좋아요. 추위도 더위도 견딜 만해요. 매일매일 그날 해낸 일이 있고, 비록 그 결과가 나빠도 다음 촬영에 도움이 되고.

-살다보면 이제 나에게 가장 좋은 일은 다 지나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는가 하면, 앞으로 더 멋진 일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을 품을 때가 있잖아요. 현재 문소리씨는 어떤가요? =얼마 전 MK픽처스 심재명 대표님을 만났는데 제 얼굴에서 빛이 난대요. 다들 그 빛이 결혼하고 3개월 간다고 하더라고요. 얼굴이 이렇게 좋을 때 반짝하고 뭘 찍어야 하는데. (웃음) 저는 그 3개월을 한 3년까지 끌어서 잘해보려고요. 결혼하고 나니 작품을 결정하기 위해 고민할 때도 마음이 편해요. 역으로 제가 남편의 고민을 나누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 것도 다행스럽고요.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지구상에 나와 살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달이 당비 내는 당원으로서 민주노동당의 모습에는 만족하시나요? =물론 속상할 때도 있고 그럴수록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대북관계에 대해서는 당의 일부가, 황우석 사태 때는 당내 여성계쪽 사람들이 의견을 낸 것을 보면서 사안에 따라서 발언하는 주체가 아직 나뉘어 있구나, 조직적으로 성숙하게 당의 입장을 종합하는 힘이 좀 부족하구나 싶긴 했어요. 학생운동 경험은 사실 이후 제 인생의 큰 기반이 됐어요. 비단 정치적 입장만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태도에 영향을 끼친 거니까. 그건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거라고 봐요.

-문소리씨는 배우로서 존경과 존중, 칭찬을 많이 받아왔어요. 여배우가 존중과 사랑을 동시에 받는 일이 어렵다고 느끼세요? =“문소리 선배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이 애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연기 바깥에서도 똑바로 살아야겠구나 긴장해요. 그것이 배우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과 충돌해요. 확 깨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다 깨면 나까지 깨질 거라는 두려움도 있어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지더라도 내 안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이기나 지켜보는 수밖에. 사랑을 받자, 존경을 받자고 마음먹기보다 자신에게 솔직하게 행동하면 이해받는 것 같아요. 반면 내가 나를 속이고 자신없는 결정을 내리면 관객도 동료도 틀림없이 알아요. 그러니까 배우는 굉장히 이유없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극의 재미 속에서 배우를 쉽게 용서하곤 하는 관객 대신 스스로에게 가장 비판적인 자가 돼야 하는 거죠.

관련인물

장소협찬 민가다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