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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 가이를 넘어서, <1번가의 기적>의 이훈
장미 사진 이혜정 2007-02-15

알싸한 박하향기를 머금고 이훈이 등장했다. 향수 내음치곤 조금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악수를 청한다. 연기경력 13년. 녹록지 않은 세월이 그에게 안긴 선물은 사람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부드러움이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인터뷰 기사들이 그의 ‘터프’함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듯했지만 이훈은 <1번가의 기적>에 등장하며 그 같은 편견에 뒤통수를 날렸다. “내 팬이라면, 나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훈은 영화 데뷔를 할 때 비슷한 캐릭터를 맡을 거라고 예상했을 텐데 나로선 다른 캐릭터가 너무 좋았다. 한번도 안 해본 역할이었다. 지고지순하고 솔직하고 순수하고.”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이 닭살스럽고 민망해 가족이며 지인들을 시사회에 초청하지 않았다고 말했을 만큼 태석은 무척 로맨틱한 인물이다. 자판기를 관리, 운영하며 밥벌이를 하는 그는 가난하고 고단할지언정 커피값 400원이 비싸다고 투덜대는 여자를 위해 하룻밤 사이 가격을 100원으로 낮추는 센스있는 애교를 지녔을뿐더러 청혼을 거절하는 연인의 마음을 지그시 응시하는 속깊은 자세도 갖췄다. “예전에는 사랑을 하면 강제로 빼앗고 협박하고 그랬는데 이번 작품에선 사랑하는 사람을 감싸기도 한다. 윤제균 감독님은 내가 웃을 때의 느낌, 선한 듯한 이미지가 좋아서 캐스팅했다고 하시더라. 내가 운영하고 있는 피트니스센터 더블에이치까지 직접 오셔서 영화 출연을 권유하셨다.”

하긴 바로 전에 출연했던 SBS드라마 <사랑과 야망>만 보더라도 이런 변화는 예상하기 힘들 터였다. 주먹질에 능한 박씨 집안 둘째아들 태수. 사고를 쳐 결혼에 이른 첫 아내를 구박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던 박태수는 이훈의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에 힘입어 더욱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촬영 들어가기 3개월 전부터 ‘근육 빼기’ 작전에 돌입해 12kg 정도 감량하고 발성, 발음법, 대사 등을 공부했다. 태수란 역할은 그전에 이덕화 선배님이 워낙 멋지게 잘하셔서 비슷한 인물을 찾느라 힘드셨을 텐데 내 목소리가 그나마 제일 비슷했나보더라. (웃음)” 김수현 작가에게 “네 연기는 가짜”라는 평가를 듣고 크게 상처입었던 일화나 SBS 연기대상 드라마 부문 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사랑과 야망> 전에 제가 연기나 제대로 할 줄 아는 물건이었습니까”라고 토로했던 일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번 작품은 그의 연기 생활에 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1994년 <서울의 달>로 데뷔한 이래 15편이 넘는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연기를 향한 열정이 어느 순간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로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연기에서 ‘기’자는 기술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전까지 나는 기술적인 기초도 몰랐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그 인물에 녹아들지는 못했다. <사랑과 야망>으로 야단도 맞았지만 그만큼 배운 점, 느낀 점도 많더라. 예전에 드라마 함께했던 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너무 날로 먹어서.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사실 이훈은 자신이 연기자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애초에 그가 품고 있던 미래는 영화감독의 길이었다. “그때 나는 ROTC였는데 아버지가 군대를 장교로 제대하면 유학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다. 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연기 생활이 더 잘해야지, 더 잘해야지 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주업으로 변하면서 틀어졌지만.”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고 집안의 우환이 끊이지 않던 중학교 3학년 시절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셀 수 없는 빛의 활자들과 마주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으로 그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꼽았다. 청춘들의 우정과 갈등을 담은 이 강렬한 범죄드라마는 갱을 선망했던 혈기왕성한 소년 시절의 그를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당시로선 무척 충격적인 영화였다. 브루클린의 고아들이 갱으로 성장하는데 마지막에는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만다.” 유난히 구설에 휩싸이는 일이 잦은 그는 <1번가의 기적> 시사회가 끝난 뒤 첫 번째 영화 출연작이 비디오 가게로 직행했다는 충격 고백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다. 모두 거침없는 그의 천성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이휘재 형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그림 일기>라는 영화다. 카메오로 짧게 등장했는데 개봉을 못해 씁쓸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재해석될 영화다. (웃음)” 이제 35살. 13년의 경력과 몸사위로 감정을 표현하는 액션영화에 출연하리란 열망을 딛고 이훈은 캄캄하지만 눈부신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여전히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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