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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밋밋한 로맨틱 코미디 <파리의 연인들>

예술과 사랑으로 모자이크된 파리에서 펼쳐지는, 다소 밋밋한 로맨틱코미디

다니엘르 톰슨의 <파리의 연인들>은 프랑스의 심장 ‘파리’가 환기하는 두 가지, ‘사랑’과 ‘예술’을 두루 관통하며 이야기의 씨실과 날실을 잣는다. 미술, 음악, 영화 그리고 연극 등을 아우르는 예술적 흥취와 그것을 동경하거나 예술, 그 자체가 자신의 인생의 일부가 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인기를 의식한 때문인지 엉뚱한 제목이 붙었지만,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오케스트라 좌석’이다. 원제는 폭발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마치 베틀 위의 북처럼 다양한 인물들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제시카(세실 드 프랑스)의 시선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에는 적절해 보인다.

제시카는 젊은 날 호화로운 삶을 꿈꿨던 할머니의 말을 듣고 파리로 상경해 몽테뉴 거리의 바에 웨이트리스로 취직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파리의 예술계를 오케스트라석에 앉은 것처럼 가까이에서 보게 된다. 앞으로 십년 동안의 스케줄이 빡빡하게 짜여 있는 피아니스트 장 프랑수아(알베르 뒤퐁텔)는 자신의 음악이 콘서트장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제시카에게 그녀같이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하소연하지만 그의 매니저이자 연인인 발렌틴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날까봐 불안해한다. 예술품을 사모으는 것으로 자신의 전 생을 꽉 채웠던 자크(클로드 브라소)는 그 모든 것을 경매를 통해 단 하루에 팔아버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의 아들 프레데릭(크리스토퍼 톰슨)은 아버지가 젊은 애인과의 사랑놀이에 눈이 멀어, 소장품들과 함께 죽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까지 팔아버리는 것 같아 석연치 않다. 인기 드라마 배우인 카트린느(발레리 레머시어)는 자신의 재능이 통속적인 드라마와 코미디 연극에 파묻히는 것 같아 거장 감독 소빈스키(시드니 폴락)와 작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이다.

무대 앞에 바로 붙은 오케스트라석은 공연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는 있지만, 영화 속 주인공 중 한명인 여배우 카트린느의 말에 따르면 ‘목만 아플 뿐 무대는 잘 보이지도 않는’ 곳이다. 제시카는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예술계 인사들의 삶을 보면서 동경과 혼란을 동시에 느낀다. 최상급의 대우를 받는 피아니스트인 장은 피아노 치는 일에 진력을 내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카트린느는 ‘내가 원하는 것은 되는 게 없다’고 투덜거린다. 화려한 도시 파리에서 자신의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는 제시카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자기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심리적인 행복도 면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가진 것보다는 갖지 못한 것을 더 아름답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법이다.

어쩌면 카트린느의 말대로 제시카는 예술가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서는 바람에 그들이 선사할 예술을 제대로 음미할 기회를 잃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에게 피아노 소리는 장의 목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고, 카트린느가 연기하는 인물보다는 그녀의 투덜거림이 먼저 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이 사라진 그곳에 인간이 들어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의 할머니가 동경했던 파리보다 더 아름다운 파리는 볼 수 없을지 몰라도, 더 많은 파리의 얼굴을 알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 영화 속에서 제시카라는 인물의 내면이 그다지 깊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그녀를 따라 파리와 예술의 표면을 부유하다가 잠깐 속내를 시식하는 정도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파리의 얼굴은 잠잘 곳이 없어 방황하던 제시카가 공연장에 몰래 숨어들어서 하루를 신세진 뒤 새벽녘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옥상에서 시내를 내려다볼 때 나타난다. 프레데릭은 명품들로 가득 찬 쇼윈도로 번쩍거리고 허영에 들뜬 사람들이 득실대는 거리를 보며, 이곳은 사람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이미지 속의 파리는 지나치게 상업화되거나 가식적인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채 그려지곤 한다. 그런데 제시카가 바라본 새벽의 파리는 잠시 동안이나마 두꺼운 화장을 벗고 자신의 수수한 얼굴을 드러낸 것처럼 보여 일면 낯설면서도 매력적이다.

<파리의 연인들>을 보고 있으면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연주되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기분이 든다. 그것은 장과 오케스트라의 협연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인물들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사랑이 동시다발적으로 얽히고 풀리는 서사 때문이다. 제시카가 서빙하거나 산책하는 동선을 따라서 다양한 인물들에 관한 정보가 제공되고, 그녀 스스로 연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무수히 재생산되는 ‘파리’와 ‘연인’에 대한 변주곡 중 하나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딱히 개성적인 해석은 없지만, 충실하게 조율된 배우들과 안정적인 연출력을 기반으로 아주 무난하고 발랄한 연주를 들려주는 로맨틱코미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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