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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개봉촉구!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사진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을까? 이번호 인터뷰 지면에서 매그넘의 사진작가 엘라이 리드는 “그렇다”고 말했는데 역사적으로도 그런 믿음을 뒷받침 할만한 증거는 많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 <아버지의 깃발>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때도 사진 한장이 미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일본의 작은 섬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꽂는 군인들을 찍은 사진. 문제는 이 사진이 그리 극적인 상황에서 찍힌 게 아니라는 데서 발생한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미국에 돌아와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전쟁공채 판매를 위해 동원되지만, 나는 영웅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자리를 훔쳤을 뿐이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영웅이 필요했던 국가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진실은 전쟁으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드러난다. <아버지의 깃발>은 이처럼 영웅신화를 다시 쓰는 영화다. 이스트우드는 이런 이야기를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도 보여준 적 있는데 이번엔 서부극이라는 장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이라는 차원에서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깃발>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조금 실망스러웠다. 동어반복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얼마간 노쇠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버지의 깃발>와 함께 연출한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를 보지 않았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관한 특집기사를 준비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대단한 작품이다. 하나의 전쟁을 적국인 두 나라의 시점에서 찍은 사상 초유의 시도는 흥미로운 퍼즐맞추기를 위한 설정 같은 게 아니었다. 시점이나 이야기가 전혀 다른 두 영화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쟁 전체를 조망하게 만든다. 그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블랙 호크 다운> 같은 전쟁영화 수작들과 다른 차원의 감흥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 같은 거대한 예술품에 압도되는 경험이라고 할까. 무엇보다 이스트우드는 관객을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의 한복판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이스트우드의 두 영화에서 전투장면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그는 전장의 입체적 체험 대신 전장에 놓인 인간의 마음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죽은 동료에 대한 죄의식, 살아 돌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불안,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 같은 감정들이야말로 이스트우드가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미군과 상대도 안 되는 병력으로 끝까지 저항하다 자결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스트우드는 그들의 죽음을 명예로운 죽음이라거나 개죽음이라는 식으로 단정짓지 않는다. 그는 개인의 사연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죽음이 집단적인 동시에 개별적 죽음임을 보여준다. 전체를 그리면서 인물 하나하나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목은 아닌 게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솜씨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를 보고나자 <아버지의 깃발>에 대해 내가 오해했던 점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깃발>은 단지 영웅신화를 다시 쓰는 영화가 아니었다. 미군이건 일본군이건 그들은 각자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미스틱 리버>나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주 특집기사에 쓴 허문영 영화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어딘가에 내던져졌고, 그곳에서 살아내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육체적으로 버틴다.” 이스트우드는 그런 최선의 노력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비극을 그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심금을 울리는 인간들을 만나게 한다. 아무쪼록 <아버지의 깃발>에 이어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가 개봉해서 여러분도 그들 모두와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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