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뉴스 앵커 한경배(설경구)는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신만만하다. 그의 아내 오지선(김남주)은 아들의 모든 것을 관리하며 남편을 맞이하는 완벽한 내조자다. 그러던 어느 날, 9살 난 아들이 유괴되면서 이들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1991년, 온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압구정동 이형호 유괴살해사건’을 모티브로 한 <그놈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차분한 말씨를 구사하는 범인의 끊임없는 협박전화에 끌려다니는 이들의 44일을 우직하게 따라간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러나 미제로 남은 유괴사건을 극화하는 것은 사방에 덫을 둔 위태로운 발걸음이다. 한편에는 상업화, 왜곡, 과도한 개입 혹은 해석의 우려가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극적 긴장감 결여 등 비대중성과 싸워야 한다. 실제 사건의 골격을 그대로 가져온 채 인물의 디테일과 캐릭터를 영화적으로 변형한 감독이 택한 전략은, 공개적인 ‘현상수배극’ 표방. 영화의 실제적 주인공이자 영화를 만든 목적에 해당하는 범인의 목소리를 연기한 강동원이 내내 현장에서 함께했음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과잉된 장르적 재미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감정을 과장하여 눈물을 유발하는 것 역시 금물이다. 감독은 여기서 나아가 범인의 실제 목소리를 듣고, 실제 몽타주를 보고 범인을 함께 찾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비록 그 선택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에 위배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얘기다.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는 박진표 영화가 말하는 바는 언제나 명확했다. 누구도 알지 못했던 노인의 성과 사랑을(<죽어도 좋아!>), 모두가 손가락질했던 그들의 진심을(<너는 내 운명>), ‘보라’는 것이다. 보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고, 이해는 곧 변화이며, 영화가 지닌 최고의 힘은 그 작은 변화에 있다는 것은 여전한 그의 신념이다. 그러나 복잡하고 비극적인 사건에서 출발한 <그놈 목소리>는, 그 주제의 못 말리는 확고함에도 불구하고 명확해지는 데 실패한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역설적인 시대상황, 과학수사를 시도하지만 매번 헛물을 켜는 수사당국의 무능력함과 형사들의 애환, 한 가정을 파괴시키는 유괴의 악랄함 등이 스릴러, 가족멜로, 사회드라마 등 익숙한 장르 속에 섞여들고, 관객은 종종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처한다. 영화와 현실, 미학과 윤리 사이의 수많은 선택 사이에서 이루어진 제작진의 고투가 묻어나는 혼란이다. 그러나 진심어린 의지가 모든 선택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