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리랑>을 선전하게 됐습니다. 이게 사건인데, 내가 신문 발표를 한 겝니다. <아리랑>에 대한 노래 한 구절을 집어넣어 가지고는 선전 문안을 크게 해서 썼어요. 그 노래 역시 내 누이 이정숙이가 불렀는데, 어쨌든 광고지도 만장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당국에 저촉이 되어 가지고 종로 네거리에서 압수를 당하게 됐어요. 내가 이제 경무국에 들어갔어. “너 어쩌자고 이런 걸 여기에 찍었느냐. 사진 내용이 이거냐, 네 자유로 한 거냐”, 이 말이야. 그래 내가 “내 자유도 아니고 또 선전 내용, 영화의 내용도 아니다. 노래 하나 집어넣고 영화 좋단 이야기밖에 더 쓴 것 있느냐” 그랬지. 그 노래가 뭔고 하니 ‘하늘의 청천에는 별도 많고, 늙은 애 살림살이 말도 많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아주 큰 글자로다가 얼핏 눈에 들어오게 박았는데, 형사는 이 문구가 불온하단 말이야. 이것 때문에 이 광고지를 압수했단 말이야. 그래 내가 이 문구만 없으면 이걸 내주겠느냐 했더니 그렇단 말이야. 그래 그 광고지 1/4 이상을 끊어냈습니다. 4절지의 1/4 이상이 끊어졌으니 광고지로 본다면 무가치하지만은 그래도 어떻게 끌어야 될 거 아니에요. <아리랑>이 이거 타이틀이 있으니까. 그래 나와서 그걸 그냥 내보냈어요.
그런데 그것이 더 문제가 됐습니다. 장안의 북촌(조선인 거류지. 남촌은 일본인 거류지- 필자) 일대에 당장 소문이 나요. ‘종로 네거리에서 <아리랑>이라는 영화를 선전하다가 광고지를 빼앗기고 잡혀갔다더라’ 한단 말이야. 이제 한 두어 시간 후에 종로 화신 뒤에서 다시 광고를 했는데 광고지에 구녁이 뚫어지고 말이 아니란 말이야. 그러니 사람들은 ‘이 속에 뭐가 있겠구나, 이 영화는 보통 영화가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극장이 그야말로 인산인해. 그래 초입에 그렇게 히트하면서 계속적으로 손님이 드는데 조서과(총독부 검열기구- 필자)에서 속수무책이지 어떻게 해요? 그래서 단성사에서는 승리의 함성이 올라가고 운규, 나, 서로 붙잡고 우는데 참 기쁨의 눈물이죠.
시상이 제일 큰 문제
말이 나왔으니 이제 검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초기에는 영화 검열이라는 것이 없었죠. 왜 그런고 하니 예술영화니 마술영화니 뭐 이런 등의 단편이니까. 그러다가 26년 6월에 검열을 해야 되겠다는 문제가 하나 섰습니다. 경기도청 보안과에서 전국 영화의 검열을 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영화 검열에 대한 기준으로 잡은 것은 첫째로 이제 사상적인 것이 제일의 문제예요. 그걸 두고 취조하는 일이 많았죠. 다른 것으로는 풍속에 관련된 것이었죠. 검열할 때의 형식을 말씀드리면 양화, 일본영화 모두 마찬가지인데, 배급소에서 대본이 이제 영화랑 같이 한권 온단 말이죠. 그때는 무성영화 시대니까, 타이틀 자막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럼 그 자막만 베낀 책이 와요. 그래 그 책을 갖다가 두권 또 다시 복사를 합니다.
복사를 해서 원대본과 복사한 것, 두권을 들여가요. 그러면 영화사에서 나온 정본에다가 이제 통과 날인을 해줬죠. 대개 오늘 대본을 제출했다고 하면은 웬만하면 그 이튿날 줬어요. 영사 기계가 두대로 그걸 가져다가 언제든지 검열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시간 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제 작품의 수가 늘고 또 영화사가 많이 늘어난 뒤에는 하루에 다 못하고 대개 이틀 정도 걸렸어요. 그리고 연말이 되면은 나흘 전부터 휴무절 때까지 즉, 정월 한달 동안 상영할 수 있는 영화의 대본을 전부 미리 빌려갑니다. 그러니까 한 극장에서 또 한 배급소에서 적어도 대여섯 가지 이상의 프로를 갖다가 미리 내죠. 그래 일본영화나 양화가 4, 5권 이상 됐을 때니까 정초가 되면 이 사람들이 상당히 바빴죠.
토키 시대, 극장에 와서 직접 검열
그 다음에는 검열이 경무국에서 조서과로 직접 넘어가 가지고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영화 검열이라는 것이 됐어요. 그때가 20년대 말입니다. 토키 초기죠. 토키가 됐을 때는 총독부 자체에 토키 장치를 못했던 만큼 극장에 직접 나와서 검열을 해줬어요. 오전에 극장 시작하기 전에 여덟시 정도에 했죠. 그때 검열관이라는 사람들은 모리 경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까다가 있었고 오까가 있었고. 오까가 무척 독했죠. 오까다가 오까 뒤에 들어온 것이고 또 이제 와다라고 있었어요. 다음에 요시다라고 그뒤로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일본서 나온 사람이죠. 그렇지만 그 사람이 제일 위일 겝니다. 요시다란 사람이. 무성영화 때 검열할 때는 영사와 동시에 내가 옆에 붙어 서서 변사의 대역을 하는 거죠. 대본을 읽는 겝니다. 그러면 검열관은 한편은 들으면서 영화 화면을 보고 있었죠. 그러다 거기서 화면에 이상한 게 있다든지 하면은 영사를 중지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토키가 된 뒤에는 자체적으로 해설이 나오기 때문에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무엇보다도 사상적으로 추출을 많이 당한 겝니다. 대개 90% 가까이 그랬는데 그 다음에 개작을 명령한다거나 수정을 요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죠. 그러니깐 국산영화는 지금같이 상영 날짜를 미리 잡고 하는 게 아니라, 제작이 끝나면 대본 만들어서 검열 맡도록 하고 그 다음에 상영 날짜를 잡고 그렇게 나가는 게죠.
검열에 일이 난 것은 하도 많아서 꼽기도 어렵지만 운규의 <두만강을 건너서>도 여러 번 파란을 겪은 거예요. 그거는 괴나리봇짐하고 바가지 차고 북간도로 유랑을 떠날 때를 이야기하는 겝니다. 농토 다 빼앗기고 나라도 잃고 그 설움이 유랑민을 만든 게죠. 그런 영화였는데 이게 오까 검열이 된 겝니다. 그래 검열을 하는데 “<두만강을 건너서>면은 이제 국경을 넘는다, 이런 얘기가 아니냐, 그러면 안 된다” 그런 이야깁니다. 왜 조선을 떠나가느냐는 거였죠. 그래 제목을 <저 강을 건너서>로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또 ‘저 강’이 어떤 강이냔 말이야, 압록강이냐 두만강이냔 말이야. 이거 안 된단 말이야. 결국에는 내가 검열관에게 “영화 내용하고는 상관이 없더라도 검열에 통과될 수 있는 타이틀을 일러주시오” 했죠. 그래 오까가 ‘행복을 찾으러’로 하란 말이야. 그래 내 차라리 <사랑을 찾아서>로 하자고 담판을 했죠. 사실 운규가 미리 일본하고 타협한 게 있어서 큰 문제는 안 됐어요. <아리랑>도 마찬가지고. <아리랑>은 제작이 일본인이었죠. 게다가. 내가 광고하고 검열받으면서부터 문제가 커진 게예요. 그래 오까가 뒷얘기하는 게 그겁니다. <아리랑>을 자기 같으면 허가를 안 내준단 말이야. “너 운 좋았다.”
복원해야 할 이름, ‘큰 고개 꼽추 극장’
그래 하고 고생한 얘기 한 김에 이건 내가 고생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제 때 우리 영화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겝니다. 그때 극장은 전부 일인들이 가지고 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한국사람이 있었어요. 박승필씨가 아니고, 박승필씨도 단성사 세를 얻어서 쓰던 거니까.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 토지를 가지고 가설을 해서 정당한 극장을 만들려고 무한히 애를 쓰다가 간 분이 한분 있어요. 한국사람의 비애라고 할까요? 일본사람의 방해가 커서 자기 손으로 변변한 걸 하나 하겠다는 소망을 못 이뤘죠. 그 사람 극장이 ‘큰 고개 극장’이라는 겝니다. 그 주인공이 곱추예요. 키가 자그마한 분이었죠. 지금의 청파동에서 아편 고개를 넘어 공덕동으로 빠지는 길입니다. 그분이 그 길 꼭대기에 극장을 지으려고 가설로다가 두었는데 해방 전까지 고투했는데도 결국에는 정식 극장을 못 지었죠. 남들은 무시하다시피 한 일을 참 고군분투했어요. 서울의 먹물이었는데 가엾게 그만 돌아가고 말았는데, 아마 극장사에 찾아서 함께 넣어야 할 거예요. 그 양반 이름이 뭔지 내가 잊었는데 ‘큰 고개 곱추 극장’ 하면 장안에 유명합니다. 다 알았었어요.
말난 김에 마지막으로 초기 극장 이야기를 하죠. 원각사가 1900년대에 들어서긴 했지만 극장으로서는 1904년 처음 영화를 상영했어요. 원래는 민속물, 연예물을 상연하다가 그게 고갈되니까 정책적으로 영화를 올리게 된 거죠. 완전한 영화 극장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정식 영화 극장이 나온 것은 1910년에 나온 고등연예관입니다. 그때 한일합방 되면서 극장 관계자들이 많이 건너왔습니다. 초기에는 양화전문관이에요. 그때 일본영화라고 해야 뭐 볼 만한 게 있겠어요? 고등연예관이 최초의 공식 상영관으로서 주도권을 잡았던 만큼 영화 상영도 역시 선택을 잘했고 변사 해설도 좋았어요. 소위 우리나라의 원로라고 하는 서상호라든지 김덕경 등등이 다 고등연예관 출신입니다. 이제 그쯤해서 우미관이 일어났거든요.
우미관은 고등연예관 형태, 모양을 끌어다가 했죠. 양화 전문관으로. 조선극장은 후에 황원균씨라는 분이 세웠는데, 3층이에요. 정원이 820명에 엘리베이터까지 있었어요. 가장 뉴스타일이라고 해서 장안의 인기를 독점하다시피 했죠. 단성사가 이제 등장합니다. 일본사람 다무라라고 있었는데 구주의 재벌이고 또 우리나라로 치면 소위 양반계급쯤 가는 인격자였습니다. 그래 그 사람이 10년에 한국에 진출하면서 1902년에 가설로 세워졌던 단성사를 개조해서 영화관으로도 썼죠. 단성사 경영은 초기 우리나라 흥행가의 대원로인 박승필씨가 했지만 소유는 일본이었죠. 단성사는 양화 전문관이었고. 20년 넘어서면서부터 서울, 지방에 극장이 더 늘어났죠. 하이고, 너무 오래돼서. 그래도 내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정리 이유미/ 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2학년 riffraff@dreamwiz.com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