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의 역사를 가진 영국 그림동화 <피터 래빗>은 출간될 당시만 해도 출판업자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파란 웃옷을 입은 토끼 피터는 아기자기하지 않고 너무 ‘사실적’이라 아이들이 지루해할 생김새였다. 이 그림을 그린 베아트릭스 포터는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자신의 그림을 결국 자비로 인쇄해 냈다. 1901년에 처음 찍혀 나온 책 <피터 래빗 이야기> 두권이 사적으로 출판한 것치고는 꽤 잘 팔렸던 모양이다. 그녀의 동업자는 포터를 대신해 대형 출판사를 찾아나섰고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프레데릭 원’(Frederick Warne & Co.)이었다. 포터의 책은 이곳에서 총 23권이 출간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1억부 이상 팔려나갔다.
영화 <미스 포터>는 “그런 토끼 책을 누가!”라고 비하 당했던 <피터 래빗>의 작가 포터에 관한 이야기다. 1868년에 태어난 빅토리아 시대 사람 포터는 마흔일곱살에 생애 첫 결혼을 했다. 좋은 가문의 남자를 찾아 시기 적절한 결혼을 올리는 것이 모든 여성의 당연한 미래였던 그때 포터(르네 젤위거)는 좋은 혼사도 남자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는 부모와 함께 사는 집의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다. ‘프레데릭 원’ 출판사의 두 경영자 형제와 달리 그들의 막내동생 노먼 원(이완 맥그리거)은 포터의 동화 세계를 공감하고 함께 나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신중한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정치계에 발을 들인 귀족 가문 의식이 투철해 포터의 부모 특히 엄마가 이들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한다. 포터는 자신의 첫 번째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미스 포터>는 순수함과 고움이 미덕인 영화다. 이 영화는 자기가 그린 그림 속의 동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말하는 환상을 서른이 넘어서도 매일같이 보고 사는 동화작가의 열정과 로맨스를 담고 있다. 독창적인 감성으로 당대의 동화작가가 된 인물의 흥망을 그린 전기영화가 아니라, 자기 의지에 따라 개인적인 삶과 사랑을 꾸렸던 여자의 멜로드라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포터는 자기 꿈이 분명하고 열정과 감정 앞에 솔직한 여성이다. 자연스럽게 포터는 19세기 말 영국사회가 요구했던 여성상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녀는 운동가형의 진보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오히려 동시대에서 뒤처진 아웃사이더로 그려진다. “결혼할래 말래”를 놓고 엄마와 사적인 투쟁을 벌이는, 꿈같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동화 속 오리 캐릭터가 장난을 걸어오는 환상에 둘러싸인 몽상가. 그 세계는 매우 좁다. 다만 그 개인적인 성격이 일상과 평범함으로 이어져서 <미스 포터>는 여성을 다룬 영화로서 지금의 관객과도 소통할 지점을 만든다. 포터는 노먼의 여동생 밀리(에밀리 왓슨)와 ‘노처녀’란 이유로 쉽게 친구가 되고 이후 두 사람은 같은 운명을 진 여성으로서 남성 중심, 자본 중심인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불안심리와 동질감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수다는 구체적이면서 유쾌하다. 어떤 이들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도 간간이 떠올리며 두 노처녀에게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상의 책임감을 <미스 포터>에 기대할 것은 아니다. 계급과 남녀차별의 문제가 19세기 영국을 살던 포터에게는 중요한 것이 틀림없었겠지만, <꼬마돼지 베이브>로 데뷔해 10년 만에 두 번째 장편을 찍는 크리스 누난 감독은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 영화에 그늘을 드리우는 걸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감독은 “요즘 영화에 폭력과 섹스없는 영화가 어디 있는가”라며 “그런 것 없이 순수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연출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감독은 <미스 포터>가 포터의 상상 안에서 생명을 얻은 피터 래빗과 그 친구들이 걱정없이 뛰놀 수 있는 세계이길 바란 듯하다. 비극을 넘어 희망을 품는 포터의 인생을 영화적으로 멋있게 열어놓기까지 세상과 삶에 대해 실망은 있어도 불신과 부정은 없어야 한다고 믿은 듯하다. 포터의 심리를 투영한 순수한 (혹은 정신병적인) 동화적 환상들이 <미스 포터> 안에서는 가장 솔직한 소통의 형태다.
르네 젤위거는 그 같은 상상의 세계와 동거하는 순수한 노처녀로 대안을 마련할 수 없는 적역이다. 본래 케이트 블란쳇이 하겠다고 확정했다가 제작이 지연되는 동안 다른 영화로 떠나는 바람에 비워진 자리다. 덕분에 포터가 된 르네 젤위거는 수줍음이나 설렘, 장난기와 호기심 같은 소녀적인 감성들을 뒤섞어 오븐 속의 쿠키인 양 부풀었다 꺼졌다 하는 얼굴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38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사랑스러워 보인다. <다운 위드 러브>에서 젤위거와 공연했던 이완 맥그리거도 순수하고 자상한 남자 노먼으로서 여배우와 좋은 호흡을 보여준다(맥그리거를 노먼 역에 추천한 이가 젤위거다). <미스 포터>는 크리스 누난 감독이 <꼬마돼지 베이브>(1995)를 찍기 전부터 영화화가 진행됐던 프로젝트다. 계획이 세워진 것만 15년, 개발 단계를 6년 거쳤는데 누난 감독은 그 6년의 시간을 함께했다. 그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3D 입체애니메이션으로 만든다고 쓰여진 포터의 동화 캐릭터들을 2D로 바꾸자고 영화사에 제안했다. 그것이 순박한 포터의 세상과 더 어울릴 듯해서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2D 이미지로 살아난 사랑스러운 피터 래빗, 제미마 퍼들 덕, 티키 윙클 부인이 <미스 포터>를 보는 당신을 가장 먼저 무장해제시킬 것임은 일단 틀림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