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가 웃고 울고 화를 낸다. 길게 뻗은 선과 수줍게 찍힌 점, 그 사이를 메운 좁은 여백을 들여다보면 손글씨가 품고 있는 각양각색의 대담한 표정들이 느껴진다. 감정을 전달하는 손글씨, 캘리그래피(calligraphy)의 심장은 그것이다. “감성적인 글꼴이죠. 캘리그래피는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이기에 감정을 담고 있어요.” 캘리그래퍼 강병인씨는 말한다. “손글씨, 서법, 서예 따위의 단어들은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아요. 손글씨나 서예의 범주에 속하지만 기본적으로 디자인적인 요소가 가미된 상업적인 글씨니까요.” 그의 말대로 손글씨, 서법, 서예라는 명사 곁에 감성적, 상업적, 디자인적 등 몇 가지 형용사들을 함께 늘어놓으면 조금 더 정확한 의미의 캘리그래피가 완성된다. 손글씨로 표기하기엔 그 범위가 무한히 넓고 서예라고 단언하기엔 너무 대립적인 개념인 셈. “서예는 작가주의적인 예술이지만 캘리그래피는 타인을 대변해요. 가수 성시경의 앨범 재킷을 작업한다 하면 정말 성시경처럼 보이도록 써야 하는 거죠.” 또 다른 캘리그래퍼 이상현씨는 설명한다. 영어 어원상으론 ‘아름답게 쓰인 글씨’라는 뜻.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kallos’에 ‘graphy’가 따라붙은 형태다. 용어가 도입된 지 5, 6년이 채 지나지 않았으나 뿌리 깊은 서예의 전통 속에서 언제나 존재했던 작업이다.
안 쓰이는 곳 없고, 못 쓰이는 곳 없는 캘리그래피
한때는 이름조차 없었던 캘리그래피가 열병처럼 끓어올랐던 시기는 2000년 즈음. 상당수 캘리그래퍼들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포스터를 장식한 거칠고 힘있는 글씨체가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은 것이 계기라고 말한다. 이후 캘리그래피는 ‘처음처럼’, ‘참이슬’, ‘산사춘’ 등 갖가지 주류를 재미나게 호명했고 읽지 않은 책, 듣지 않은 음반의 내용을 대신 전달하는가 하면 디자이너 이상봉씨의 단정하고 기품있는 옷 위에 수놓여 세계인의 이목을 빼앗았다. 그뿐이랴. 선으로 표현될 리 없는 음식의 맛을 눈에 보일 듯 표현하는 한편 느림, 여유 등 추상적인 단어의 뜻을 종이에서 우러나게 만들기도 했다. 현재 캘리그래피는 영화 포스터, 포장디자인, 간판, 지면광고, 영상광고, 책표지, 앨범 재킷 등을 정복했고 패션과 인테리어, 환경디자인 등 더 넓은 분야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그야말로 대단히 전투적인 영토 확장이다. “그 경계가 끝이 없어요. 사실 문자가 사용되지 않는 영역은 드물거든요.” 캘리그래피를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 회사 필묵의 대표로 잘 알려진 캘리그래퍼 김종건씨는 말한다. 캘리그래피 개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그는 99년 필묵을 차린 뒤 캘리그래피를 널리 알리고 실용화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엔 글씨를 왜 돈을 주고 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죠. 다들 술 한잔, 식사 한끼를 대접하거나 충무로 대필소를 찾아 몇 만원만 지불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선발주자인 만큼 눈에 띄는 캘리그래피들도 많이 선사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SK텔레콤 광고에 나왔던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문구. 독일월드컵을 준비하며 SK텔레콤에서 내놓은 이 글귀는 필묵의 손길에 형체를 얻어 거리를 가득 채운 붉은 티셔츠를 장식했다. 2006년 한해 동안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에 온기를 불어넣었던 거대한 글판의 글씨도 유명하다. 계절마다 바뀌어 걸리던 이 캘리그래피들은 정신없이 직장과 집을 오가던 보행자들에게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은근히 설파하곤 했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그 모양새를 특징적으로 변화시킨 점 또한 흥미롭다. 봄을 소재로 하는 글귀에서 ‘ㅎ’ 위의 점은 갓 자란 새싹마냥 힘차게 솟아오르고 바람을 언급하면서는 자유롭게 흐르는 바람을 연상하도록 부드럽고 유려하게 흘려쓰는 재주를 부린다. 한편 ‘ㄹ’을 뒤집은 모양새와 흑백 영상과 대조를 이루는 붉은색이 도발적이던 비씨카드 CF의 캘리그래피, 모델로 등장한 행위예술가 낸시 랭만큼 경쾌하게 떠오르던 메가패스 CF의 캘리그래피 또한 필묵에서 도맡아 한 작업들이다. 한편으론 영화 포스터 작업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장이모 감독의 <연인> 포스터 로고 타이틀은 중국 중앙미술학원에서 캘리그래피 특강을 했을 당시 중국 학생들이 큰 관심을 보인 작품. “아무래도 자국영화라 더 좋았나봐요. 그 글씨를 통해선 대나무의 속도감을 표현하려 했어요. 농묵으로 잘 번지지 않는 아트지 위에 빠르게 써내렸죠.”
이쑤시개로도 쓰고, 크리넥스에도 쓰고
<연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캘리그래피에서 재료, 즉 붓과 종이, 먹의 선택은 무척 중요하다. 대상의 특성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글씨를 쓸 수만 있다면 연필, 사인펜, 펜, 크레파스, 납작붓, 메이크업 브러시, 심지어 잡초, 나무젓가락, 이쑤시개, 유리 막대기, 면봉까지 가리지 않는다. 서예를 중심에 두는 캘리그래퍼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도구는, 그럼에도 여전히 붓이다. 강병인씨는 “펜 혹은 볼펜, 사인펜을 사용한 글씨도 손글씨에 포함되지만 집필묵에선 동양적인 느낌이 드러나요. 펜은 선으로만 나타나는 데 반해 붓은 질감이 두드러지거든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면에 있어선 붓을 따라올 수 없죠”라고 말한다. 붓만 해도 그 종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양모, 칡뿌리나 대나무, 말꼬리, 소 귀털 등 바탕이 되는 재료에 따라 우러나는 느낌 또한 제각각이다. 반면 종이는 질감 표현 때문에 신경써야 할 부분. “화장지만 해도 올록볼록 엠보싱이랑 부드러운 크리넥스가 달라요. 획이 촉촉하면 슬프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죠. 종이마다 번짐에 있어 차이가 나니까요.” 이상현씨의 설명이다. 그런 까닭에 화선지, 아트지, A4지, 심지어 두꺼운 박스 종이까지 총동원된다. 먹의 경우도 물감, 잉크 등으로 대체할 수 있으나 대부분 먹을 선호하는 편. 대신 농담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를 유도한다. 김종건씨는 “농묵, 중묵, 담묵. 먹의 농도에 따라 그 결과물도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외에 표현하려는 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색다른 시도가 가능하다.
글꼴보다 중요한 건 느낌
재료의 폭이 넓고 작업 형태도 자유롭지만 캘리그래피가 휘리릭 내려쓴 한획에서 완성되는 건 아니다. 한 단어를 수십번, 수백번 고쳐 연상하고 먹 묻은 종이가 수없이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글씨가 나올 수 있다. 배상면주가에서 개발한 ‘대포’라는 술 로고를 작업했던 강병인씨는 이렇게 말한다. “어렸을 적에 동네 주막집에서 대포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많이 했어요. (웃음) 소주 댓병도 대포라고 부르고. 친구하고 가볍게 술 한잔 걸치는 듯한 서민적인 냄새가 묻어났으면 했죠. 계속 썼어요. 고객이나 디자인 회사가 원하는 글꼴도 중요하지만 그 네이밍에 어울리는 글꼴을 쓰다보면 하나가 톡 튀어나와요. ‘ㅍ’을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느껴지죠.” 캘리그래피 술통 대표인 그는 회사의 이름만큼 술을 좋아할뿐더러 유독 술병 작업을 많이 했다. 근래 진로에서 새로 선보인 ‘참이슬 Fresh’ 로고도 그의 솜씨. 20대 여성을 주소비층으로 잡은 제품이라 “올드하지 않고 젊게” 표현했다. 동글동글하고 귀염성있는 글씨가 언뜻 봐도 풀잎에 맺힌 이슬과 흡사하다. 술 로고 작업 중에서 강병인씨가 최고로 꼽은 것은 세트로 선보인 ‘복분자’, ‘포도송’, ‘오디담’. 해당 식물의 특성을 고스란히 옮긴 세 작품 중에서 남성의 힘을 상징하듯 획이 불뚝 솟구친 복분자 로고가 특히 웃음을 자아낸다. <씨네21>의 코너명 전영객잔과 오리온 오징어땅콩 CF의 ‘眞’자 또한 그의 손을 탔다.
이상현씨의 캘리그래피 중에선 음반 타이틀이 인상적이다. 춘자, 성시경, 디기리, 나윤권, 탁재훈 등 음색도, 음악 세계도 어디 하나 비슷한 곳이 없는 가수들이 모두 그의 붓질을 빌려 앨범을 완성했다. “두 가지 앨범 타이틀을 하루에 동시에 진행한 적이 있어요. 하나는 동방신기의 앨범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신인가수 장리인의 앨범이었는데 음악의 분위기가 상이했어요. 캘리그래퍼는 다른 사람의 감성을 대변해야 하기 때문에 희로애락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해요. 댄스그룹의 음반은 신나는 기분으로 작업하지만 발라드풍 음반을 마쳐야 하면 갑자기 조용해지죠.” 그의 캘리그래피에 가수들의 자필 사인까지 품은 CD 재킷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니 제법 두둑한 높이가 된다. 작업 요청이 상당히 급하게 들어오기 때문에 힘든 점도 있지만 음반 타이틀은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야라서 의미가 깊다. 이상현씨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작품은, 그러나 지난해 크게 흥행했던 최동훈 감독의 <타짜> 로고 타이틀. 굉장히 거친 칡뿌리를 손에 쥐고 조금 두꺼운 종이 위에 써내린 글씨다. “작업을 앞두고 화투를 샀어요. 좋은 패가 들어왔을 때의 느낌은 어떻고 형편없는 패가 들어왔을 때의 느낌은 어떨지 궁금했거든요. 사무실 식구들이랑 ‘섰다’를 했죠. (웃음) <타짜> 타이틀로 전달하고자 했던 건 승부예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이긴 줄 알고 돈판을 쓸어갈 때 아니다, 나다 라며 히든카드를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승부. 패를 내려놓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먹이 팍 튀게 했어요.”
“좋은 캘리그래피는 대상의 감성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
내놓은 작품도 작업의 특색도 다르지만 캘리그래퍼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좋은 캘리그래피란 대상의 감성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이죠.” 이를 위해선 상품 혹은 작품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며 여기에 창의적인 발상이 덧붙여져야 한다. 바탕 디자인에 녹아들지 못하는 작품은, 따라서 그 자체로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훌륭한 캘리그래피라고 할 수 없다. “캘리그래피가 발전하려면 더 많은 캘리그래퍼들이 탄생해야 해요. 다섯명이 보여줄 수 있는 캘리그래피와 스무명이 선보일 수 있는 캘리그래피는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사람들의 미감은 다양해요.” 김종건씨의 바람처럼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캘리그래피가 더 먼 길을 무리없이 달음박질하려면 우선 캘리그래퍼의 수부터 늘어나야 한다. 비록 그 역사가 짧긴 하나 식을 줄 모르고 높아지는 인기와 달리 실상 전문적인 캘리그래퍼는 두손을 꼽을 정도. 이를 위해 대다수의 캘리그래퍼들은 강의에 힘쏟고 있으며 제각기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있다. 김종건씨는 워크숍 ‘한·중·일 캘리그래피 현황과 전망’과 캘리그래피 아트숍, 강병인씨는 한글날 퍼포먼스와 전시회, 이상현씨는 최초의 캘리그래피 개인전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중. 마음을 뒤흔드는 캘리그래피를 거리 곳곳, 집안 구석구석에서 더 자주 그리고 더 친숙하게 만날 미래가 머지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상의 느낌이다
‘꽃피는 봄이오면’의 김혜진 대표
‘꽃피는 봄이오면’(꽃봄)은 영화 포스터 제작사. 꽃봄의 김혜진 대표가 영화 포스터 작업을 통해 캘리그래피를 접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캘리그래피에 입문한 그에겐 서예가에서 출발한 캘리그래퍼들이 갖추지 못한 몇몇 특성들이 있다. 우선 그는 문방사우의 선택에서 좀더 자유롭고 컴퓨터 작업의 비중도 더 크게 인식한다. 캘리그래피가 안 어울리는 작품이면 도로 가져가시라 과감하게 권유하는 것도 전체 구성에 민감한 천생 디자이너라서 생겨난 태도인 듯. 캘리그래피용 필기구를 보관하는 손때 묻은 재봉틀을 보니, 그러나 캘리그래피에 대한 애정만큼은 가볍지 않겠구나 싶었다.
-캘리그래피를 시작한 계기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포스터 로고 타이틀 작업에서 처음 시도했다. 액션이 강한 영화라 부드럽지 않은 캘리그래피가 나왔으면 했다. 딱딱한 재료를 찾다가 나무젓가락으로 표현했다. 이후 영화 포스터는 물론 베스킨라빈스 광고 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편, 드라마 <궁> 포스터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캘리그래피를 선보였다. 지금은 캘리그래피 엽서도 만들고 있다.
-꽃봄에서 작업한 캘리그래피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들고 싶다. 노개런티인 대신 내 마음대로 만들게 해달라고 그랬는데 류승완 감독은 읽을 수가 없다며 싫어하더라. 근래에 개봉한 <허브>도 잘 쓴 글씨다. 허브라는 소재가 너무 가볍게 와닿을 수 있어 파워풀한 느낌으로 표현했다. <가족>은 배우도 그렇고 임팩트가 크게 없는 영화 같아 타이틀을 조금 크고 세게 썼다. <중독>은 제목 그대로 사랑에 중독된 남자를 그리느라 좀 독스럽게 표현했고.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타이틀 로고는 복사지에 연필로 쓴 뒤 스캔을 받아 콘스라스트를 세게 준 작품이다.
-캘리그래피로 쓰면 좋을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은 어떻게 구분하나. =일단은 감수성있는 멜로영화가 더 잘 어울린다. 말에도 맛이 있듯 캘리그래피로 가면 글맛이 느껴지니까. 캘리그래피랑 정자를 차례로 올려본 뒤 더 나은 것을 선택할 때도 있다.
-어떤 캘리그래피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나. =글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느낌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화면에 붙였을 때 그 느낌. 영화건 제품이건 캘리그래피에 있어선 대상의 컨셉이 먼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