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자료원, 네이버, <씨네21>에 이르기까지 필모그래피가 천차만별이다. =사실 나도 몰라. (웃음) 영화연구가 정종화씨에 의하면 아역이 71편이라던데. 커서 한 게 일흔 몇편. 정리를 해야겠다 싶다가도 다른 사람이 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어. (웃음) 일전에 여성영화인의 밤시상식에 갔어. 이경희 여사님이 공로상을 받았거든? 그래서 <모정>이라는 영화를 상영했어. “저거 나 아니야?” 했는데 나더라고. (웃음) 내 두 번째 영화. <황혼열차> <모정> <초석> <눈 내리는 밤>까지는 내가 기억해. 여섯살 먹은 나를 스크린에서 보니까 우리 아들 어렸을 때가 생각나더라고. 둘째놈이 내 모습을 많이 가졌거든.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나하고 비슷해.
-선친께서 제작을 해서 어렸을 때부터 영화하는 분들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코미디영화를 하나 했는데 구봉서, 곽규석 선생님이 자주 오셨지. 감독분들도 몇분은 출입이 잦으셨고. 게다가 김기영 감독과 박암 선생은 대학 동창이니까. 아버지도 그렇게 영화계에 끌려들어오신 거야. 원래는 10종 경기 선수였고 체육선생을 하셨거든.
-<묵공>에 참여한 계기가 궁금하다. =우리나라 배우들이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연기를 하는 점이 <묵공>과 맞아떨어진 듯해. 그리고 제이콥 창(장즈량) 감독이 <무사>를 너무 인상적으로 봐서 제안이 왔던 것 같아. 아시아 감독들이 그런 건 비슷하게 느끼나봐. 서극 감독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박찬욱 감독도 공리랑 한번 촬영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그 정도면 필연적으로 만나야 하는 거지.
-<묵공>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한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전장에서 바둑 두는 장면. 비주얼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너무 근사한 거야. 이것 하나만으로도 참 멋있다, 두 인물이 한번에 확실히 설명이 되는 거야. 장수지만 여유나 기품도 있고 상대 장수에게도 존경심을 갖는 캐릭터구나 싶었어.
-극장에서 보신 뒤 소감은 어떤가. =나도 큰 화면으로는 처음 봤어. 사실 드문드문 나오기 때문에 감정연결이 좀 불안하기도 했어. (웃음) 그런데 오늘 보니까 대결구도가 서서히 나타나고 둘이 격돌할 때 주제가 드러나는 방식이 노골적이지 않아서 좋더라. 옛날 영화스러운 미덕이 있어. 클래식하다고 할까.
-<라디오 스타> <묵공>에서의 연기는 1980년대 전성기 시절의 느낌이 많아서 반가웠다. =노는 역이지. (웃음) 이런 걸 나는 많이 기다렸어 사실. 다른 사람들이 요즘 나에게 필요로 하는 건 영화의 중심을 잡아주고 내가 노는 게 아니라 놀게끔 해주는 역할이니까. 그래서 배우로서의 매력이 조금 떨어질 수밖에 없지. 사실은 약간 하자가 있고(웃음) 그런 역이 배우가 하기도 편안하고 관객도 좋아하는데 말이지. 자기 기량도 맘껏 보여줄 수 있고.
-30년 가까이 충무로에 적이라곤 없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일, 개인적으로는 힘들지 않나. =사실 굉장히 힘들어, 그리 지내는 거.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더 힘들 것 같아. 내가 차라리 지금처럼 힘든 게 낫지.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말을 이제 와서 들으면 더 힘들지 않겠어? (웃음)
-예를 들어 신인감독이 파격적인 역을 주고 싶어도 주저하는 상황인 듯하다. =그런데 기껏 저질러도 영화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어. <헤어드레서>가 그랬어. 나는 파격인데 사람들은 그게 싫은 거야. “저렇게까지 할 거 뭐 있어” 그런 거지. 김기덕 감독이 나에게 아주 섭섭해하는 <사마리아>도 그랬지. 원래 딸을 죽이는 설정이었는데 나는 그건 정말 연기라 생각해도 못하겠더라고.
-자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뭐하나. =얼마 전에 우연히 시집을 한권 샀는데 읽다보니 되게 좋아. 신경림 시인 옛날 시집인데 되게 좋아. 시라는 게 원래 그런가? 맘을 편하게 해주기도 하고, 편할 때만 들려오기도 하고. 마음의 여유가 그만큼 있어야 만나지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이제 겨우 가족이랑 시간 보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