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공>은 중국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전쟁사극이다. 와이어와 CG로 도배한 무협액션이 주류인 요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한눈에 보기에도 꽤 고전적이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름다운 화면이 아니라 흙탕물에 범벅이 된 사실적인 액션장면이 나오고 CG 캐릭터 대신 진짜 엑스트라들이 수천명 등장한다. <와호장룡> 이후 <영웅> <연인> <무극>이 향했던 탐미적 무협액션의 길에서 멀리 벗어난 드문 예이다. 차라리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영향을 받았던 김성수 감독의 <무사>가 어떤 영감을 줬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탐미적 액션이냐, 사실적인 액션이냐는 주제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묵공>이 하려는 이야기는 묵직하고 현실적인 것이어서 이런 사실적 액션에 잘 어울린다. 김혜리 편집위원(이번주부터 기자에서 편집위원으로 직책이 바뀌었다)의 표현을 빌리면 “<묵공>의 깃발은 장이모의 <영웅>이 섰던 지점 반대편 봉우리에서 휘날린다”. <영웅>은 진시황이라는 영웅의 힘을 빌려 중국이 하나로 통일되면 살육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묵공>은 이런 논리에 동조하지 않는다. 두 영화의 차이는 곰곰이 생각해볼 주제이다.
흔히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은 그런 명제에 부합한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고 역사에 대한 해석이 모두 같지는 않다. 사실이, 결과가 그러했으므로 진시황은 우러러 받들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과로 원인을 대체하면 그런 착각이 생기게 마련이다. 최근 박정희를 닮을수록 인기를 얻는 현상을 보면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중국의 통일을 이뤘으므로 진시황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처럼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으므로 독재를 했건 인권유린을 했건 박정희는 위대하다고 믿는 것이다. 논리의 비약은 경제발전을 하려면 독재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이어진다. 이런 식이면 피노체트건, 후세인이건, 히틀러건, 김일성이건 하나같이 위대한 영웅이다. 그들이 다스렸던 시절, 국가는 강했고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룬 경우도 많았다.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이런 사고는 권력자는 무조건 공경하고 권력에는 반항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묵공>은 같은 사실, 같은 결과를 다르게 보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 혁리는 위기에 처한 성을 지키러 나선다. 공격은 사악한 것이며 방어만이 평화를 구하는 길이라는 묵가 사상을 따르기 위함이다. 따뜻한 인간애에서 비롯된 이상을 실현하려는 혁리의 모습은 숭고하고 혁리의 방어술은 완벽하다. 현실이 공정하다면 혁리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공정한 적이 있던가.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묵가의 이념은 이상으로만 남았다. 슬프지만 그게 사실이므로 <묵공>의 결말은 예상보다 쓸쓸하고 가슴 아프다. 인간애가 없는 권력만이 승자로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묵공>은 이렇게 말하는 중이다. 처절하게 깨지고 말 텐데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노라고. <영웅>이 승자의 역사, 노예의 도덕을 가르친다면 <묵공>은 패자의 역사, 인간의 도덕을 가르친다. 문득, 진시황의 반대편에 혁리가 있었는데 지금 우리에겐 박정희의 반대편에 내세울 혁리 같은 인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노무현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번주 특집기사로 올해 7월 노사협약이 발효되면서 이뤄질 촬영현장의 변화를 예상해봤다. 아직 시행되지 않아 감이 오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관계자들은 엄청난 격변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겐 생존의 문제이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겐 한국영화의 미학이 바뀌는 일이다. 이영진 기자의 가상시나리오를 통해 다가올 변화의 양상을 상상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