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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가 불가능한 시대의 연가, <오래된 정원>
이영진 2007-01-03

'그때 그 사람들', 어떻게 사랑했을까. 서정시가 불가능한 시대의 연가(戀歌).

그런 시절이 있었다. 누워서 침 뱉거나 재갈 물고 침 흘리거나. 눈 질끈 감고 제 몸 불사르지 않는 한 누구나 그래야 했다. 그게 살아남은 자들의 ‘예의’였다. 정말이냐고. 1980년대, 한국이 그랬다. 그때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또 하나의 시대였다.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꾸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라는 물음조차 죄악이었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은 묻는다. 한 세대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죄의식 아니면 무용담으로 남아 있는 이분법의 80년대를 향해. 정말 사랑조차 그 시대엔 몹쓸 짓이었냐고.

황석영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래된 정원>은 장기수였던 한 남자가 출소한 뒤 사랑했던 한 여자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따른다. 군부독재에 반대하던 20대 사회주의자 현우(지진희)는 16년8개월 만에 세상을 활보할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어느새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처럼 그를 둘러싼 세상 또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변해 있다. 한때 목숨을 걸었던 동지들은 “인생은 길고 혁명은 짧다”고 탄식하며 주먹다짐을 하고, “누가 뭐래도 난 아들 편”이라던 어머니는 떵떵거리는 억대 복부인이 되어 늙은 아들에게 고기쌈을 내민다.

변해버린 세상,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가슴에 품고 있던 단 한장의 증명사진을 들고 현우가 윤희(염정아)를 찾아 떠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윤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현우는 그녀와 나눴던 짧은 사랑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는 갈뫼로 향한다. 도피 생활 중에 자신을 “숨겨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몸도 줬던” 윤희를 떠올리는 동안 그는 자신이 수형 생활을 했던 16년8개월이 그녀에게 더한 포박의 세월이었음을 깨닫는다. 감옥에서의 시간을 인내하게 했던 것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신념이 아니라 아직도 끓고 있는 사랑이었음을 또 감지한다.

그렇다고 임상수 감독이 지고지순한 사랑 예찬론을 펼치진 않는다. 대신 영화는 ‘오만’을 부려서라도 시대의 악몽을 제발 좀 떨치라고 말한다. 과거를 들먹이며 현재를 방기하지 말라고 나직하게 충고한다. 이러한 처방전은 감독의 전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현우는 존재를 알지 못했던 자신의 딸을 만난다. 그리고 딸로부터 어떤 화해보다 ‘쿨’한 제안을 받는다. “이젠 헛게 다 보이네”라는 현우의 독백은 역사든, 사회든, 가족이든, 거대한 권위의 감염된 상처들은 개인만이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그만의 윤리처럼 보인다(덧붙여 김우형 촬영감독이 든 카메라 움직임을 눈여겨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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