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네코아에서 <스위트 노벰버>를 봤다. 이 난을 맡은 이래 처음 가본 시사회였다. 시사회장 앞에 서 있던 극장 여직원의 살가움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가 <씨네21> 기자를 사칭한 덕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스위트 노벰버>는 넬슨 모스(키아누 리브스)라는 광고회사 사원과 새러 디버(샤를리즈 테론)라는 백혈병(의 한 종류인 듯하다. 병명이 어려워서 듣고도 잊었다) 환자가 11월 한달 동안 나누는 사랑의 이야기다.
1968년에 나왔던 같은 제목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라고 하는데, 원래의 영화는 못 보았으니 모르겠고, 2001년도판 <스위트 노벰버>는 밋밋했다. 물론 시한부 생명이라는 고전적 장치 속에서 사랑은 불꽃 같고 벚꽃 같다. 다시 말해 화사하고 격하다. 그런데 그 결이 섬세하지 못하다.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눈물 흘릴 채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끝내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주연을 맡은 두 배우의 얼굴은 얼마간 인상적이었다. 키아누 리브스는 <매트릭스>에서 처음 보고 이번이 두 번째 상면인데, 역시 잘났더구먼.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배우는 처음 보는 듯한데, 똘똘하고 야무진 마릴린 몬로 같았다. 백치미를 극복한 (또는 박탈당한) 마릴린 몬로가 샤를리즈 테론이었다.
영화의 제목은 <스위트 노벰버>지만, 새러에게나 넬슨에게나 영화 속의 11월이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달콤함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것은 늘 씁쓸함을 예비하고 있는, 조마조마한 달콤함일 뿐이다. 사실 (북반구에서의) 11월의 보편적 이미지는 을씨년스러움이므로 영화의 분위기는 계절과 적절히 조율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스위트 노벰버’의 ‘스위트’는 역설인지도 모른다. 11월은 반쯤은 가을이고 반쯤은 겨울이다. 그러니까 어슴푸레한 계절이다. 낭만은, 특히 병든 낭만은, 태양이 작열하는 밝음 속에서보다는 빛이 힘을 잃은 어슴푸레함 속에서 더 활짝 피게 마련이므로, 11월이라는 달은 낭만에 적합한 토양이다. 병은 흔히 죽음의 전조이고, 자연의 질서는 대개 죽음을 겨울 위에 포개놓는다. 영화 속에서는 새러의 죽음이 묘사되지 않지만, 그녀는 아마 겨울에 죽을 것이다.
11월의 사랑으로서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려가요 <동동>(動動)이 묘사하는 중세의 사랑이다. 애인의 부재를 바탕에 깐 이 월령체 노래는 전체적으로 파경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11월의 사랑은 특히 서럽다. “十一月ㅅ 봉당 자리예/ 아으 汗衫 두퍼 누워/ 슬할 사라온뎌/ 고우닐 스옴 녈셔/ 아으 動動다리.” 이 연을 현대어로 옮기면 이렇다. “십일월 봉당자리에, 아아! 한삼 덮고 누우니, 슬픈 일이로다. 고운 님과 헤어져 홀로 살아가는구나.” 봉당이란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흙바닥이다. 마루를 놓을 자리를 비워놓은 것이 봉당이다.
화자는 그곳을 잠자리로 삼는다. 거기 누워 속적삼 하나를 덮고 누우니 슬픔이 새삼 복받쳐오른다. 그 추운 11월 밤에(그 시기의 달력은 음력이었으므로, 실제의 계절은 12월이었을 것이다) 한데에 누워 있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그 추위보다 화자를 더 괴롭히는 것은 애인의 부재다. 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서러움이 겨울밤의 화자를 엄습한다. 어쩌면 화자는 마음의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 한데의 추위로 몸을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위트 노벰버>의 ‘노벰버’는 양력일 터이므로 <동동>에서는 시월에 해당한다. “十月애/ 아으 져미연 바랏 다호라/ 것거 바리신 後에/ 디니실 한부니 업스샷다/ 아으 動動다리.” 이 연은 현대어로 이렇다. “시월에, 아아! 저민 보리수 같구나! 꺾어버린 다음엔 지니실 한 분이 없으시도다.” 고려 사람들이 실제로 보리수 열매를 탐했는지, 아니면 화자가 불교적 상상력으로 이 노래에 이국주의의 옷을 입혔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사람들은 보리수 열매를 따기 위해 그 가지를 꺾지만, 일단 열매를 따고 나면 그 가지를 지니지 않고 버린다.
애인에게서 버림받은 화자는 자신의 신세를 그 버려진 보리수 가지에 비유한다. <동동>의 화자가 여성이리라는 데 연구자들의 견해는 일치한다. 그 여성은 남성이 여성과 정분을 맺는 것을 ‘꺾어버린다’고 표현한다. 여성은 남성과 정을 통함으로써 ‘꺾인다’ 동서양의 여러 자연언어에 산재한, 여성의 처녀성 상실을 비유하는 표현으로서의 ‘(꽃이나 가지의) 꺾임’(예컨대 영어의 deflower)은 달마다 남자를 갈아치우는 <스위트 노벰버>의 여주인공 새러에게는 하나의 우스개일 것이다.
영화 속의 공간 샌프란시스코는 1960년대 말 히피들의 메카였다. 새러는 21세기의 히피다. 그녀는 중산층의 바쁨과 윤택과 구속을 내던지고 게으르게, 가난하게, 자유롭게 산다. 새러가 달마다 남자를 갈아치우는 것은,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성애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박애를 실천하기 위해서다. 박애는, 자유와 함께, 히피들의 모토였다. 그건 그렇고, 우리의 히피 새러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을 지지할까?고종석/ 소설가·<한국일보> 편집위원 aromach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