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를 보면 감독이 보인다. 천상의 목소리를 지녔지만 어마어마한 거구 때문에 대창가수에 머물면서 폰섹스 아르바이트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한나(김아중)가 사활을 건 전신성형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지만 고통스럽게 성형의 대가를 치르는 과정을 그린 <미녀는 괴로워>는 영리한 코미디다. 외모지상주의를 꼬집으면서도 그러한 편견을 버릴 수 없는 사회를 인정하고, 자칫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는 코미디를 구사하다가도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 오히려 잘못은 아닌가 자문하게 만든다. 옳은 소리만을 되풀이하는 영화는 분명히 아닌데, 우리 역시 그렇게 옳은 말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고 돌려 묻는다. 자학과 피학이 무분별하게 난무하는 코미디영화 속에서 <미녀는 괴로워>는 사려 깊진 않아도 겸손하고, 완벽하진 않아도 매력적인 대중영화다. 김용화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데뷔작 <오! 브라더스>를 깔끔하게 완성하여 흥행에 성공한 그의 이름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평단의 열렬한 반응을 얻은 것도 아니었고, 영화의 재미에 반응하는 관객 역시 감독의 이름을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영화까지 대중적 성공을 거둔 그는 이제 영화업계에서는 기억할 만한 이름이 됐다. 할 만한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것, 책임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그는 거장은 아니어도 좋은 대중영화 감독이다.
-전신성형을 거쳐 미인이 된 여자의 괴로움이라는 설정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이야기가 동명의 원작 만화와 다르다. 어떤 기사를 보니, 가수지망생의 이야기를 듣고서 주인공을 대창가수로 설정했다는데, 원작을 먼저 본 건가, 가수 이야기를 먼저 들은 건가. =이 영화는 내가 데뷔작으로 준비하던 스릴러 <오르페우스>가 엎어지고 난 뒤, 작가로 참여해서 초고까지 썼던 작품이다. 결국 영화화까지 이르지 못했고, 다른 시나리오로 빨리 데뷔하겠다는 생각에 쓰고 연출한 게 <오! 브라더스>였다. 근데 이후까지 계속 <미녀는 괴로워>가 생각나던 차에 가수지망생을 만났고, 이런 식으로 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만화만을 가지고 스토리텔링을 끌어가는 건 자신도 없고 감이 안 잡혔는데 대창가수에 코러스 등을 하는 그 가수지망생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고 나니, 원작 만화가 담고 있는 주인공의 고통을 밝고 재미있게 만들면서도 여러 가지를 시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거기에 트렌디한 부분까지 업고갈 수 있다는 계산을 하게 됐다.
-영화의 마지막, 한나가 콘서트에서 자신의 성형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은 ‘이렇게 변한 내가 과연 예전의 나와 같을 수 있나’라는 사뭇 철학적인 이야기를 던진다. 갑자기 장르가 바뀐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초고는 원래 지금보다 많이 살벌했다. ‘네가 예뻐지려는 건 너의 성적 가치를 높이는 것, 성적 계급을 한 단계 높이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독한 시나리오였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코미디의 느낌이 적고 진지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시나리오를 읽는 사람들이 펑펑 울 정도였다. 지금도 몇몇 대사로 그런 느낌이 남아 있게 된 건데, 그래서 그런지 그 부분이 좀 투박하긴 하다.
-영화 속 한나의 상태는 일종의 장애라고 볼 수 있는데, <오! 브라더스>도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갈등을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장애인이라고 생각한다. 내 친척 누이 중 한명은 뇌성마비에 소아마비가 겹친 장애인인데, 어릴 적에는 그 누나의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를 만날 베고 잤고, 친한 친구 중에는 귀가 안 들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내가 패럴리 형제를 좋아한다. 노골적으로 장애를 소재로 삼지만, 이게 뭐가 이상하냐, 그냥 주변에 있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고 대하는 게 좋다. 사실 육체보다 심리적으로 장애를 겪는 게 더 많고 심각하지 않나. 이제는 장애인을 희화화했다는 말을 들어도 불쾌하지 않다. 나는 내 영화 속 인물들을 희화화한 게 아니라 그저 똑같은 인간으로 대한 것뿐이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두 영화 모두 탄탄한 시나리오의 코미디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객관적인 시나리오 작법을 위한 나름의 노하우가 있을 것 같다. =글쎄. 다른 분들이 어떻게 쓰시는지도 모르겠고, 내 방법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시나리오의 서사는 결정한 상태에서, 트리트먼트를 오랫동안 공들여 쓴다. 열 내지 열다섯 덩어리 정도의 시퀀스를 놓고, 2, 3개월에 걸쳐서 각 장면의 개요와 목적을 세워나가는데 그 목적의 층위를 다양하게 하려고 한다. 한나에게는 고통이지만, 상준에게는 한나의 또 다른 발견이 된다는 식으로, 장면의 층위를 풍부하게. 그런 과정을 거친 뒤, <오! 브라더스>의 시나리오는 1주일 만에 완성했다. 이번 영화는 각색 과정에서 노혜영 작가와 함께했고, PD도 많은 도움을 줬다. 인터뷰도 많이 했다. 성형수술 많이 한 사람과 이야기를 일년에 걸쳐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자주 했고, 성형외과 의사도 많이 만났다.
-노래가 중요한 소재 중 하나고 공연장면도 몇번에 걸쳐 등장하는 등 일종의 음악영화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원래 내 꿈이 공연디렉터였다. 학창 시절에는 아무래도 한국영화가 지금 같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으로는 먹고살기 힘들 것 같기도 했고. 학교 때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연장면에 특별히 공을 많이 들이지도 못했고, 아쉬움도 많다. 주어진 규모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공연장면이래봤자, 워낙 공연 실황 DVD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것들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
-대형 공연장면도 있으니, 엑스트라도 많이 동원됐을 텐데. =50명에서 최대 400명까지 불렀다.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객석을 넓게 잡은 장면은 다 CG인데, 이 자리를 빌려 CG를 해주신 EON 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블루스크린 촬영을 하지 않은 장면, 엄청난 노가다였을 텐데,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완성도를 보여줬다.
-주인공의 노래실력이 굉장히 중요한데, 배우에게 직접 맡겼다. 불안하진 않았나. =일단 화면에 나온 분량은 100% 다 직접 불렀는데, 김아중이 실제로 노래를 굉장히 잘하는 편이다. 맛깔스럽게 부르는 것이 잘 부르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목소리도 요즘 친구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유의 느낌, 에너지를 살리는 쪽으로 훈련을 많이 했다. 물론 처음엔 당연히 립싱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음악감독이 노래시켜도 되겠다고 하기에 데모테이프를 만들어서 들어봤는데 괜찮겠다, 싶었다.
-김아중의 뚱녀 분장이 화제가 됐는데, 한나가 얼마나 뚱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특수분장은 할리우드에서 온 스탭들이 했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뚱뚱함과 미국의 뚱뚱함은 많이 다르다. 그래서 그분들이 처음 보여준 이미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정도면 뚱뚱한 게 아니라 거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대역이 될 만한 모델들 사진을 찍어서 키 170cm에 몸무게 95∼100kg 사이면 그냥 봤을 때 ‘헉! 뚱뚱하다’고 느낄 만하다고 판단했다. 키는 김아중과 맞춰야 하니까 고정돼 있었던 거고.
-수술 전 한나의 캐릭터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다. 영화는 원작과 달리 그렇게 음울한 성격은 아니던데. =순진한데 장난기가 많은 캐릭터라고 할까. 너무 순진하거나 우울하게만 묘사하면 뚱뚱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될 것 같았다. 남들이 보면 자살할 이유밖에 없어 보이는데도 한나는 삶의 의욕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내가 원래 굉장히 남루한 삶을 살면서도 긍정적인 인간형을 좋아한다.
-배우로서 선뜻 캐스팅에 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는데, 김아중의 연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어떤가. =깜짝 놀랄 만큼 잘한 부분이 많았다. 김아중은 과도기에 있는 배우고, 그런 상태에서 내가 너무 많은 걸 요구하면 혼란스러울 거라는 생각에 연출에서 수위 조절을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영화에서 많이, 빠르게 성장한 것 같아서 만족스럽다.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배우들이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 하고, 모험을 꺼리는 데 비해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겠다고 결심한 것만으로도 100점이다. 연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그렇지, 저게 한나인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져들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오! 브라더스>도 그렇고, 자잘한 조연까지 모두 좋은 배우를 쓰고, 이번에는 이범수 등 적은 분량에 우정출연한 배우들도 꽤 많다. 배우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할 것 같다. =미장센, 조명, 미술, 사운드, 편집 모두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출은 연기를 끌어내는 사람이다. 영화 자체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데, 내가 생각하는 인간에 최대한 부합하게끔 연출하는 게 감독 몫이 아닐까. 촬영 전까지는 기술스탭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가장 중요한 것이 배우를 배려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말없이 배우들에게 맡길 거라면 감독이 필요한 이유가 없잖나. 그래서 슛 들어가면 모니터 앞이 아니라 카메라 옆에 있는다. 테이크가 끝난 뒤에 바로 피드백을 줘야지, 모니터랑 뒤에 있는 감독이 멀리서 ‘됐어, 좋아’라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두 영화를 그렇게 잘 찍었으니까 당분간은 변함없을 것 같다.
-영화 속 슬랩스틱의 비중과 수준에 대해서 고민이 있었을 텐데. =물론이다. 그 결과가 완성된 영화다. 내가 하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관객과 함께 갈 수 있는 수준에서 계산을 한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슬랩스틱이어야지 너무 비현실적이면 관객도 외면할 거고, 항상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필요하다. 물론, 내가 좀더 나이를 먹으면 슬랩스틱의 비율도 점점 줄어들겠지.
-반복되는 대사 중 하나가,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는 거였다. 본인에 대한 말인가. =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 대사는 결국 ‘세상은 절대 안 변하니까 너의 세계관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설사 세상이 바뀐다 해도 본인이 행복해질 수는 없을 거다. 이건 내가 살아가면서 내린 결론이다. 내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쯤에서 많이 받았음직한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성형수술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어떤가. =성형을 찬성하면서도 성형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뻐서 나쁠 건 없지만, 그렇다고 성형수술을 하는 것도 폐착이라는.
-매우 애매하게 들리는 그 입장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다. =그러면 성공한 거다. 영화를 보면 한나가 성형수술로 어떤 괴로움을 겪었는지 가장 적나라하게 목격한 친구 정민이 결국 성형수술을 결심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확고했던 친구가 말이다. 결국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얘기기도 하고. 불행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수술을 택하는 게 인간이라는 거다. 결국 ‘비터 스위트’(bitter sweet) 엔딩이다.
-하지만 성형을 종용하는 환경과 모순된 편견을 충분히 보여준 것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상준(주진모)이 “성형수술해서 예뻐지면 좋지. 근데 내 여자는 안 돼”라고 말하는 것.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인가. =상준의 많은 부분이 내 모습이긴 한데, 그 대사는 모르겠다. 솔직히 나는 미모와 관련해서 계급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양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덜 드러내는 것뿐이지, 누구나 외모에 대한 편견은 있잖나. 그러니 자신의 계급을 상승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질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러려면 편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거의 없잖나.
-조금은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질문이 될 수도 있겠다. <오! 브라더스>는 잘 만든 몇편의 상업영화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는, 나쁘게 말하자면 여러 영화를 참고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나도 기분 안 나쁘니까 편하게 질문해도 된다. (웃음)
-음. 그런 면에서 이 영화도 그런 말을 들을 소지가 있지 않냐는 얘기다. <내겐 너무 가벼운 당신>을 비롯해서…. =나는 유능한 사람이 아니고, 영화를 만들면서 모든 걸 참고한다. 책이든, 인터넷에서 본 글이든, 영화든. 중요한 건 그것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가 아닐까. 당연히 그 영화도 많이 참고했고. 내가 남한테 절대 안 보여주는 노트가 있는데 거기엔 이 부분에서는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을 참고한다는 것이 메모되어 있다. 이번 키스신은 <당신이 그녀라면>의 어떤 키스신, 이런 식으로. 촬영 직전까지는 아무 거나 닥치는 대로 보는데 호러는 안 본다. 사람을 무섭게 만드는 건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것이고 너무 쉽다. 정서적인 부분을 다룰 때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존경하는 영화적 스승이 있다면. =대학 4학년 때 지도교수셨던 이광모 감독님. 세상에서 제일 존경한다. 나의 실낱같은 재능을 믿고 오늘날까지 가장 큰 용기를 주셨다. 그분이 시사회를 보러온다고 하면 제일 떨린다.
-이번 영화에 대해선 뭐라셨나. =(쑥스러운 웃음) 올해 최고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셨다는데, 그 어떤 호평, 오늘(12월18일) 관객 105만명을 넘었다는 소식보다도 기분이 좋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영화 만들기는 너무 힘든 작업이고, 내가 하고 싶다는 이유로 몇십억원씩 돈을 들여서 영화를 만들 만큼 유능한 사람도 아니다. 당분간 쉬면서 공부하고, 사람들도 연구하다가 내가 자신있게 하고 싶은 이야기, 즐거움과 고통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때 다음 영화를 만들고 싶다. 지금은 정해진 게 없다. 어쨌든 조금씩 더 재밌고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 정도? 돌이켜보면 3년 전 <오! 브라더스>나 <미녀는 괴로워>나 내가 내 나이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선택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