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는 하나의 목적, 부시의 재선 실패를 위해 <화씨 9/11>을 만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시가 얼마나 ‘멍청한지’를 보여주는 데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영화의 목적은 실패했고 부시는 또다시 세계 최고 권력자에 선출됐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들의 터전이 파괴된 뒤에야 세계는 부시의 폭력성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대통령의 죽음>은 그 뒤늦은 깨달음의 결과물이다. 영화는 부시의 간교함을 분석하는 대신 그를 향한 시민들의 거친 분노로 초점을 이동한다. 그리고 부시에게 복수할 방법 혹은 그가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할 유일한 방법으로 영화가 선택한 것은 부시를 암살하는 것이다. 미국 시민들의 분노와 배신감은 부시의 암살에 대한 합당하고 절실한 근거로 제시된다. 부시가 여전히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선택은 상당히 선정적이다. 실제로 감독 가브리엘 레인지는 수차례 살해위협에 시달렸고 미국의 대표적인 극장 체인들로부터 상영 거부를 통보받았다. 그러나 영화의 이러한 태도를 용기있는 결단이라고 볼 수 있을까? <대통령의 죽음>이 역사에 접근하는 태도를 과연 얼마나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9·11 테러는 환상이 현실에 침투한 순간처럼 다가왔다. <대통령의 죽음>은 역으로, 실제 현실이 허구 속에 개입하는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부시와 관련된 방대한 실제 자료 화면들이 허구의 장면들과 짜맞추어진 결과, 이 허구의 영화는 한편의 다큐멘터리 고발극의 모습으로 탄생한다. 이를테면 부시의 암살장면은 그가 시카고의 경제클럽에서 연설한 실제 뉴스장면에 배우들의 모습을 끼워넣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부시가 암살당하던 때 그를 경호했던 경호원, 그 순간을 목격한 기자, 시위대와 대치하던 경찰, 그리고 용의자로 오인된 이라크전 파병 군인 등의 긴박한 상황에 대한 증언과 감정적 동요도 중간중간 삽입된다. 영화는 DV, HD카메라에서 휴대폰까지 다양한 도구를 동원하여 각 상황에 적절한 촬영기법을 찾아낸다. 무엇보다 사실에 가장 근접한 장면들을 연출해내기 위해, 때때로 의도적으로 화면의 초점을 흐리거나 영상의 품질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경찰과 시위대의 위태로운 대치 상황, 군중 틈에서 부시가 암살되는 순간의 예측 불가능하고 역동적인 상황을 ‘사실’처럼 담아내기 위한 것이다. 영화는 수많은 자료들을 자신이 원하는 하나의 틀에 맞추어 자르고 붙이길 반복하면서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의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대통령의 죽음>은 부시가 시카고에 도착하여 과격한 시위대들과 충돌하고 결국 총격을 받아 사망하게 된 부분과 FBI와 정부 관계자들이 그 범인을 추적해가는 부분으로 나뉜다. 그 과정에서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부시의 위선(북한의 핵문제도 주요한 이슈로 다뤄지는데, 김일성과 북한 군인들의 모습이 담긴 실제 자료화면들도 종종 삽입된다), 반전주의자들과 소수자들의 분노에 찬 저항, 미국 내 아랍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가해지는 폭력, 이라크 참전 군인의 국가에 대한 배신감 등 9·11 이후, 미국사회를 뒤덮은 징후들이 집대성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2007년 12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년 뒤의 미국은 지금보다 더 나빠진 상태로 그려지고 있다. 부시는 여전히 아무런 반성없이 세계 경찰로 활보하고 미국은 시민들의 분노로 포화된다. 미국의 미래에 대한 감독의 이러한 예견은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다’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시가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없다’라는 단호한 확신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허구의 드라마를 보는 심정은, 개운하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시대의 비극을 단 한번이라도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부시의 죽음을 꿈꿔봤을 것이다. 그 꿈이 마치 현실처럼 영화 속에 펼쳐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꿈을 마음껏 즐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허구와 실재를 자의적으로 뒤섞어 미래의 역사를 구성하는 이 영화의 방식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대통령의 죽음>은 오직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자신이 취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역사를 재구성하는 자의, 혹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조종하는 자의 그 어떤 윤리적인 자의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건 영화의 목적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에 면죄부로 작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는 9·11 이후 벌어진 모든 사태들에 대한 미국인 혹은 감독의 자기반성의 흔적이 담겨 있지 않다. 그저 상상 속에서 부시를 죽여버린 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은, 혹은 진짜 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싶은 그들의 욕망. 그것이 이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9·11 이후의 모든 문제들을 부시 탓으로만 돌리는 건 참으로 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