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고생한 다른 스탭들도 많은데 어쩌다 자신이 나오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신우성씨는 못내 쑥스러운 눈치였다. 행여 다른 스탭들의 공을 가리진 않을까 염려가 됐던 모양이다. “무거운 짐 좀 나르고, 운전한 정도”라며 멋쩍게 웃는 그는, <베사메무쵸>의 현장과 스탭들의 뒷바라지라는 소임을 아직 잊지 않은 듯했다. 새벽 6시에 모일 제작진의 아침거리를 위해 3∼4시에 장을 보고, 남들보다 1시간 이상 먼저 현장에 나가 스탭들이 춥거나 배고프지 않도록 미리 배려하는 제작부 맏형 역할 말이다.
지난 2월 중순, 영희가 오페라를 보러 가는 인천 첫 촬영으로 문을 연 <베사메무쵸>는 그의 “첫 작품”. 이전에도 다른 영화에 잠깐씩 참여하긴 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겨울에서 여름까지 5개월 남짓 동안, 그는 제작진이 먹을 것과 잘 곳을 챙기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시키기 전에 미리 요구를 읽을 수 있어야 된다”는 그가 끌고 다닌 이스타나는 추위엔 뜨거운 커피를, 더위엔 빙과류를 상비한 ‘이동 포장마차’로 인기를 끌었고, 가족적인 현장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현장 살림을 꾸려가는 것 외에 주된 일은 촬영장소 섭외. 50여회에 이르는 촬영의 상당분이 세트 촬영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철수를 유혹하는 상류층 부부의 저택을 구하는 게 난제였다. 겨우 감독이 원하는 고급 저택을 찾았는가 하면, 주인이 촬영을 허락지 않아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그 집이 다른 이에게 팔려 철거 직전이란 소식을 듣고 달려가 촬영 허가를 받아내기까지 1달이 걸렸으니까. 저택장면에 쓰인 고가의 소품을 지키기 위해 촬영 뒤 홀로 텅 빈 집에서 밤을 새우는 것도, 철수가 아들을 업고 가며 울먹이는 살곶이 다리장면을 찍고자 관리인을 설득하는 것도, 당시에는 고생스러웠지만 고마운 경험이다.
하루에 서너 시간도 못 자기 일쑤지만 발로 뛰는 제작부 경험이 소중한것은, “거꾸로 살아온” 그의 이력 때문이기도 하다. 한문교육과를 다니다가 명지대 연극영화과로 이적한 그는, 97년부터 매니지먼트 사업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극장에 드나들고, 이소룡과 성룡을 보며 영화의 꿈을 키웠지만 마땅한 통로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매니지먼트가 길이 아니란 생각에 직접 영화사를 만들고 영화 기획도 해봤으나, 무경험에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다. 그때 집안의 친분으로 안면이 있던 강제규 감독을 만난 인연은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영화를 하려면 제작 시스템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그의 조언을 듣고, 강제규필름에서 제작부부터 시작해 프로듀서 훈련을 쌓겠다고 맘먹었기 때문. “허울 좋은 오너였을 때보다 몸은 힘들지 몰라도, 누가 알아주는 걸 떠나 스스로 인정하고 만족하는” 제작부 일에서 그는 배운 게 많다고. <베사메무쵸>처럼 여운이 남는 영화도 좋지만, 현장을 누비며 다진 내공으로 언젠가 <벤허>나 <콘 에어>처럼 “통쾌하고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글 황혜림 blauex@hani.co.kr·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