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는 어린 시절 별명이 형광등이다. 선발투수로 치면 슬로스타터(경기 초반엔 좀 헤매다가 시간이 갈수록 잘하는 타입)라고 할까. “웃기는 이야기에도 반응이 느리고 둔한 편”인 1980년생 여배우. 형광등의 ‘형광’은 반딧불을 뜻한다. 물가를 날며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사람들 앞에 등장한 김태희는 사실 배우로 나서기를 오랫동안 망설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교복 모델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언니에게 제안이 왔는데 고등학생이라 민망해서 나를 시켰다. 너무 신나서 하더란다. ‘난 재능이 없으니까 안 될 거야’라면서 오랫동안 자신을 억눌렀던” 김태희는 의류학을 전공한 대학교 1학년 겨울 모델로 활동을 시작한다. <선물>의 어린 정연이 출발이었다. 일요일에 느닷없이 불려간 촬영에서 시를 읽는 중학생을 연기할 때만 해도 별 감흥은 없었다. “대학 생활 숙원이던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 홍두현 감독의 <신도시인>에 출연을 제안받으며 그의 마음은 요동쳤다. “진로가 결정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걸 꼭 해보고 싶었다. 연기가 뭔지도 몰랐지만 처음 캐릭터를 직접 분석하고 인물의 사고방식, 가정환경, 성장배경, 주변 사람들을 혼자 상상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자신없이 임했는데 결과도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다음에도 좋은 기회가 있다면 독립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김태희는 말했다.
김태희는 “시행착오 중”이다. 중국 촬영만 5개월, 무술연기가 필요했던 <중천>을 본격적인 스크린 데뷔작으로 택한 이유는 “영화가 너무 하고 싶은데 부담이 좀 있었다. 미성숙하지만 천진난만한 소화라는 인물은 영화를 시작하는 내 처지와 매우 비슷했다. 더 세속에 찌들기 전에 이 역할을 해보자는 마음(웃음)”이란다. “이것저것 해보는 단계다. 처음에는 온 가족을 동원해서 리허설을 해보고 현장에 갔다. (웃음) 시간이 촉박하고 피곤할 때는 게으름을 피우기도 한다”는 그는 “<중천>을 마치고도 내가 뭘 배웠는지 어떤 면이 향상됐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를 다시 해보고 싶다”라고 의지를 보였다.
피멍이 들도록 와이어를 타면서도 “놀이기구 타듯 즐거워했던” 성취욕이 강한 배우 김태희는 “잘할 수 없는 일은 쉽게 손대지 않는” 신중론자다. <중천>이 그에게 준 선물은 “상대 배우와 교감하는 일”이다. “상대 배우의 분위기나 기분 상태, 감정, 연기가 나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 같다”고 커다란 눈동자를 깜박거리는 김태희는 “스스로 만족하고 관객도 납득시킬 수 있는 연기를 하는 날”을 기다리며 쉽게 카메라 앞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 같다. 슬로스타터일수록 완투하는 게임은 많은 법이니까.
김태희가 본 선배 연기자 정우성
선배지만 놀라워 기본적으로 연기가 안정적이다. 무엇보다 주변 여건을 살펴보는 여유가 있다. 나는 내 연기를 하다보면 주변은 하나도 안 보이고 놓치는 부분도 허다하다. 그런데 우성 오빠는 그걸 다 파악한다. 연출을 꿈꾸는 사람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전체를 둘러보는 눈이 있다.
선배라서 아쉬워 오빠는 촬영장에서 망가지는 걸 즐긴다. 자신은 별로 즐거울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는 것 같다. 특히 소품이 많은 이승의 거리 세트장에서는 이상한 모자를 쓰고 빗자루를 들고 도화꽃을 막 날리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웃음) 사진을 보여드려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