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현실에 또 다른 색깔을 덧입힌다. 꼿꼿하던 학교 건물은 측은해지고, 지쳐 있던 하굣길은 활기를 얻는다. 건조한 일상을 보습하는 비는 보는 이의 공상에도 젖어들어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낸다. 우울하거나, 추억에 잠기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괜히 설레거나. 이달의 단편으로 선정된 최현명 감독의 <비 오는 날의 산책>은 그처럼 비가 만들어낸 뜻하지 않은 상상의 세계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살이 삐져나온 우산을 들고 학교에 온 소녀는 창피한 마음에 외로운 하굣길을 자처한다. 친구들이 사라진 교정, 누가 볼세라 바쁘게 뛰어가던 소녀 앞에 개구리 한 마리가 나타난다. 빗방울을 맞은 개구리는 점점 커지고, 키를 맞춘 둘은 발을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늘을 뛰어다니고, 하늘에서 헤엄을 치며 빗속의 산책을 즐기는 그들은 그렇게 잠시나마 친구가 된다. “평범한 여중생의 귀여움”을 담은 캐릭터와 익살스러운 가야금 선율이 친숙한 매력을 더하는 <비 오는 날의 산책>은 4분30초라는 짧은 시간에도 인물의 정서와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즐거움을 밀도있게 농축했다.
올해 나이 서른셋인 최현명 감독은 원래 대구에서 회화를 전공하던 미술학도였다.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었지만, 당시는 애니메이션 학과가 없었기 때문에 선택한 전공이었다. 캔버스에서 매력을 느끼면서도 살아 숨쉬는 그림을 원했던 그는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몇년의 방황을 거쳐 지난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진학했다. “같은 학번 동기들이 대부분 나보다 열살씩이나 어렸다. 덕분에 ‘아저씨’도 아니고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웃음)” <비 오는 날의 산책>은 최현명 감독의 3학년 정기심사를 위해 제작된 작품. “예전부터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비 오는 날의 산보>를 좋아했다. 언젠가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여러 이미지를 그려놓은 게 있어서 추진했다.” 하지만 서정적인 음악에 맞춰 구상한 스토리는 울적한 느낌이 강했다. 안 그래도 남자와 여자가 등장해 묘한 분위기를 나누는 이야기만 그렸던 최현명 감독은 이번만큼은 전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용단을 내렸다고. “대부분 선배들의 작품은 교수님도 졸게 할 만큼 난해했다. 내 작품은 보면서 즐겁고 행복한 작품이었으면 했기 때문에 그동안 구상하던 것들을 죄다 바꿔야 했다.” 음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음악원 백대응, 김혜숙 교수의 작품을 허락받아 사용했고, 여고생이 하굣길에 바라보는 풍경을 담으려던 계획은 여중생의 생기발랄한 판타지로 바뀌었다. “특별히 지향하는 장르는 없다. 다만 엄청난 액션이 등장하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고 재밌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터는 “상식의 범위 안에서 자연스러운 감동을 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러고 보면 작품 속 소녀와 개구리의 만남이 서로에게 우산을 빌려주고 도토리 씨앗을 건네던 토토로와 사츠키의 만남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현재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오돌또기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캐릭터와 스토리보드를 맡고 있다.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은 기초가 가꿔지지 않은 상태에서 비대한 크기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50, 60대가 되어서라도 충분히 기초를 다진 다음에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30년 뒤면 최현명 할아버지의 원숙하면서도 촉촉한 꿈나라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