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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판의 미로..> 현실과 공명하는 판타지

현실과 판타지의 연쇄를 통해 역사를 반추하는 <판의 미로…>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에는 신화와 동화의 여러 요소들을 빌려 직조한 판타지 세계가 등장한다. 테세우스의 신화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신화의 단골 메뉴인 미로에서부터 일상적 세계에서 신화적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의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곤 하는 목신 판을 직접 등장시키기도 하고, 신화적 주인공이 특정한 임무를 떠맡도록 유도하는 전령으로서의 요정이 오필리아(이바나 바케로)를 ‘판의 미로’까지 인도하기도 한다. 동화의 세계에서 어린이의 나르시시즘적 애착 상태를 표상하는 거울이나 수정구술의 등가물처럼 ‘보이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책’이 등장하여 오필리아가 보기(알기) 원하는 것을 이미지로 그려낸다(판타지 장르를 통해 이미지로 세상을 그리고자 하는 델 토로의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빨간 모자>에서도 잘 드러나듯,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동화에서 나타나는 붉은색에 대한 애착은 <판의 미로…>의 전반적인 이미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옛이야기의 매력>을 읽어보라).

하지만 나의 관심은 <판의 미로…>가 이러한 요소들을 차용하여 어떠한 판타지 세계를 창조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가 스페인 역사의 한 시기(1944년 프랑코 정권이 내전에서의 승리를 확정한 무렵)를 배경으로 하는 현실 세계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판의 미로…>는 판타지 장르에 곧잘 뒤따르는 현실도피적이라는 비판이 반복되어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현실에 대한 부정적 가정(negative subjunctive)을 통해 구현된 판타지적 세계가 오히려 현실을 반추하도록 하는 영화인가.

오필리아, ‘No’라고 말하는 긍정적 독재자

자신이 지하 왕국의 공주임을 알지 못한 채로 오필리아는 만삭인 어머니와 함께 정부군의 대위로 있는 새아빠 비달(세르기 로페즈)의 부대로 향한다. 정부군을 통솔하고 있는 비달은 늘 시계를 보며 정확하게 시간을 체크하는 시간 강박만큼이나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이상한 믿음으로 똘똘 뭉친 인물로, 이후 부인이 건강이 악화되자 의사에게 아들과 부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면 아들을 택하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냉혈한이다. 오필리아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할 비달 대위에게 반감을 느끼고 엄마에게 둘이 살면 안 되는지 묻지만, ‘언젠가 어른이 되면 너도 이 엄마를 이해하게 될 거다’라는 전세계 어른의 상투적 대답이 되돌아온다. 그날 밤 곤충의 탈을 쓴 요정은 오필리아를 ‘판의 미로’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판은 그녀가 지하왕국의 공주라는 사실과 왕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보름달이 뜰 때까지 세 가지 임무(용기, 인내, 희생)를 완수해야 함을 알려준다.

동화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분석하는 브루노 베텔하임의 <옛이야기의 매력>에는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다. 동화의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이 곧잘 공주, 왕자, 왕비, 임금 등으로 변모하는 것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것에 대한 하나의 보상이자 시련 극복 이후 찾아오는 미래에 대한 약속인데, 이때 이들 존재들은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아닌 바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독재자’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판의 미로…>에서 오필리아 역시 그 엔딩에서 공주로 재탄생함으로써 임무 수행에 대한 보상을 받지만, 처음부터 오필리아가 그런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판의 미로…>는 허위의식으로 시작한 오필리아의 여행이 삶의 능동적 주체라는 결실로 이어지는 과정을 담는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영화의 판타지 부분만을 뚝 잘라 이야기했을 때이다.

동화책을 품속에 꼭 품고 있는 오필리아의 첫 등장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가 판이 제시한 세 임무를 떠맡는 이유는 그것들이 표상하는 인본적주의적 가치들을 몸소 실천한다는 사명감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자신이 읽었던 동화책의 공주처럼 될 수 있다는 허위의식 또는 나르시시즘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욕망에 빠져 있는 오필리아가 판이 임무를 부여할 때 ‘의문의 여지없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판을 만난 다음날 오필리아가 자신의 어깨에 새겨진 초승달 문양을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공주님’이라고 만족하듯 속삭이는 장면이나, 그녀가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지하 왕국의 공주라 칭하면서 거대한 두꺼비에게 명령조로 말할 때조차도 그녀는 자신이 읽었던 동화 속 공주의 행동을 흉내내는 소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의 두 번째 임무였던 ‘인내’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필리아에게 마지막 임무가 ‘희생’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행위에는 나르시시즘과의 결별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필리아는 실패 이후 다시 한번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해 나타난 판이 갓 태어난 동생을 데리고 미로로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부여된 임무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오필리아는 마지막 임무를 앞두고서야 자신이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 앞에서 판이 아이의 신성한 피를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할 때, 오필리아는 판에게 ‘안 돼’라고 말함으로써 이기적인 나르시시즘적 상태에서 벗어나 타자에게 시선을 돌리는 이타적 주체로 거듭난다. 오필리아는 그렇게 ‘공주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공주 되기’에 성공한다. 이점에서 <판의 미로>는 반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버림’으로써 세계를 구원하고자 했던 <반지의 제왕>과 맞닿아 있다.

현실과 판타지의 대화

물론 이러한 동화적 세계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심리적 난관을 해소해주는 순기능을 담당한다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어른을 위한 동화’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어른들을 위한 동화’임을 내세우는 영화들은 타락한 현실을 마주하다 오염된 눈을 잠시나마 정화해주는 현실도피적 식염수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하지만 <판의 미로…>는 ‘예정된 결말’로 향하는 동화(판타지)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오필리아가 경험하는 지상 세계의 현실과 적절하게 조응해나간다. 김현정 기자가 지적한 것처럼(<씨네21> 580호) “<판의 미로…>의 놀라운 점은 판타지와 현실이 한치의 어긋남없이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판타지와 현실이 에셔의 판화인 <손을 그리는 손>처럼 서로가 서로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자신의 구조로 통합해내는 영화는 그리 흔하지 않다. <판의 미로…>는 로즈메리 잭슨(<환상성>)이 말하는 ‘환상적인 것’, 즉 과장된 것과 일상적인 것 모두를 취하면서도 그 둘 중 하나에 속하기보다는 이 둘을 대화하도록 하는 구조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영화는 오필리아가 첫 번째 열쇠를 얻기 위해 무화과나무 안으로 들어갈 때, 대위가 정부군을 이끌고 숲속의 반란군을 찾아 첫 출군하는 모습을 교차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준다. 또한 오필리아가 판타지 세계에서 지하 왕국으로 귀환하기 위한 세개의 열쇠를 찾는 과정은 현실 세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이 식료품을 보관하는 창고 열쇠를 사이에 둔 갈등과 대구를 이룬다.

물론 <판의 미로…>의 가장 큰 매력은 현실 세계의 어른들의 변화와 오필리아의 변화가 서로 공명하는 순간이다. 메르세데스는 연인인 페드로가 속해 있는 반란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면서도 대위 곁에서 그의 가정 일을 돌보아야만 한다. 그녀의 동료들이나 마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부군에 속해 있지만 반란군을 돕다 이내 숨지게 되는 의사의 말처럼, 오필리아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복종할 때의 이익을 위해 복종하는 행위’에 익숙해져 있는 인물들이다. 카르멘이 오필리아에게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라는 대답 속에 숨겨진 해답은 그것이 잔혹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당연한 현실 원칙으로 수용하여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어른들의 세계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썩어가는 다리를 잘라내는 한 반란군 모습과 정부군 돕기를 거부한 대가로 그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의사의 모습, 정부군의 포로가 된 뒤 입을 다물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한 말더듬이 반란군 등 자기희생적 모습은 스스로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판에게 “안 돼”라고 말하는 오필리아의 변모 과정과 공명하면서 영화의 주제가 공허한 허공으로 날아가지 못하도록 현실의 토대에 붙들어 맨다.

오필리아의 엄마는 동화 속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은 요정들 이야기와 같지 않다고, 세상은 잔인한 곳이라고 말하면서 판이 건넨 식물을 불태워버린다. 직후에 동화적 세계를 부정했던 오필리아의 엄마는 출산 중 세상을 떠나고, 그리고 이후 반란군과 관련한 두명의 죽음이 이어진다. 델 토로는 이러한 장면의 연쇄를 통해 비극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물론 <판의 미로…>가 꺼내든 처방전이 그리 새롭지는 않다 해도, 그것이 상투성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냉혹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망각해버린 진실들을 다시금 일깨워, 우리의 현실을 반추하게 하는 힘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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