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이 수놓인 붉은 들판에 하얀 사거리가 뚫렸다. 작지만 또렷한 남녀 한쌍이 그 길 위에서 서로를 응시한다. 한발 앞선 여자에 비해 뒤로 물러난 남자는 한층 더 고민스러운 듯하다.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두 사람은 어떤 사연을 지녔기에 이토록 아련한 느낌일까.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의 영화 포스터로 선정된 <포도나무를 베어라> 포스터는 화가 이수동씨 작품. KBS 드라마 <가을동화>에서 윤준서(송승헌)가 그린 그림의 원제작자이기도 한 그는 마음을 위로하는 따뜻하고 포근한 화폭으로 유명하다. 일산에 위치한 작업실을 찾아 <포도나무를 베어라> 해외 영화제용 포스터를 준비하는 그를 만났다.
<포도나무를 베어라> 포스터를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알고 지내는 미술부 기자가 민병훈 감독과의 연결 고리였다. 사실 그림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매우 다양한데 그런 작업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그냥 살면서 영화감독 만나기란, 그리고 화가를 만나기란 참 어렵지 않은가. 그렇게 치자면 영화감독이 화가를 만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거다. (웃음) 그런 재미있는 우연이 겹쳐 흔쾌히 포스터 작업을 수락하게 됐다.
이번 포스터는 어떻게 구상했나. 영화를 즐겨 보진 않지만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작업 전에 받아봤다. 영화가 애잔하고 가슴 아픈 게 내 그림 성향하고 비슷해서 이해가 잘되더라. 신을 사랑하기 전에 사람부터 사랑해라,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포도나무라는 건 수도원과 하느님을, 그림 속의 사거리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실제로 극중 남녀가 길에서 만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길 주변에 그려진 자잘한 꽃들은 이 세상엔 사랑이 아주 즐비하단 걸 의미한다. 그러니까 길만 벗어나면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상황인 거다. 나도 마음에 들었지만 민 감독님도 보곤 좋아하더라.
<가을동화>에도 그림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가을동화>도 그렇지만 정채봉씨 시집이 다섯권 나왔는데 표지가 다 내 그림이다. 사실 정채봉, 윤석호 감독, 민병훈 감독 모두 나와 닮은 점이 많다.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감성에 호소하듯 부드럽게 스미는 작품을 추구한단 측면에서. 그러다보니 눈이 밝은 사람들이 어떻게 연결을 해주더라. 아무래도 성향이 비슷하다보니 작업도 수월했고 흥미로웠다.
대중적인 화가로 불리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지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전에 내 그림은 아주 터프했는데 그땐 나를 위한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영화도 그렇지만 그림도, 시도, 드라마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그리되 그걸 응축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야 한다. 선 너머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에게 여기로 오라고 손 흔드는 것보다 내가 먼저 선 하나 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작품은 질이 낮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림은 도 닦는 게 아니니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