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의 악당 중 가장 매력적이었던 이는 끈적한 문어발로 오르간을 연주하던 플라잉 더치맨의 선장 데비 존스였다. 부서진 사랑으로 아파하는 이 묘한 악당을 창조해낸 사람은 조지 루카스의 영화·애니메이션 특수효과 스튜디오인 ILM(Industrial Light & Magic)의 CG 크리처 모델러 홍정승씨. ILM이 할리우드 최초의 특수효과 스튜디오란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입사해 <반 헬싱> <아일랜드> 등의 작업에 참여한 그의 현재는 흥미로운 면이 있다. 서울산업통상진흥원에서 진행하는 강의에 초청돼 4년 만에 한국을 찾은 홍정승씨를 만났다.
ILM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1975년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특수효과팀을 꾸렸는데 이 팀이 회사가 되면서 ILM이 탄생했다. 특수효과의 역사나 다름없는 회사로 <어비스> <터미네이터> <백 투 더 퓨쳐> <쥬라기 공원> <스타워즈> 시리즈 등 수도 없이 많은 영화에 참여했다. 이젠 고참자들이 직접 차린 회사들, 예컨대 오퍼니지 등이 ILM의 경쟁업체로 부상하고 있다.
CG 크리처 모델러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 다른 작업의 뼈대가 되는 모형을 완성하는 사람이 모델러다. 모델러 중에는 프랙티컬 모델, 즉 세트나 모형 등 실제적인 물체를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CG 모델러로 컴퓨터를 이용해 작업을 한다. 또한 하드 서피스 모델러들이 표면이 딱딱한 사물, 헬리콥터, 우주선 등을 만드는 반면 크리처 모델러들은 사람, 외계인, 괴물 등 생명체의 모형을 창조한다.
어떻게 CG에 관심을 갖게 됐나. 화가가 되리라 꿈꾸며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미켈란젤로가 그리던 식의 전통적인 리얼리즘을 좋아했는데 다들 요즘은 컨셉 아트가 대세고 그런 그림은 잘 안 한다고 하더라. <터미네이터> <쥬라기 공원> 등을 보며 CG에 관심을 갖게 됐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참여한 영화가 <반 헬싱>이라고. 그렇다. 갓 입사한 시기에 <반 헬싱>을 맡아 여자 뱀파이어 두명과 휴 잭맨이 늑대로 변신하는 장면 등에 손을 댔다. 그 뒤 <마스크2>에 참여해 마스크 위로 드러나는 입모양을 만들었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까닭에 다소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트리플 엑스2: 넥스트 레벨> <아일랜드> <우주전쟁> 등에서 하드 서피스 작업에 참여한 뒤 실력을 인정받아 <캐리비안의 해적…>의 데비 존스를 도맡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 <캐리비안의 해적…>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특수효과 스튜디오들도 경쟁이 치열해서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회사의 실력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했다.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눈과 입을 CG로 만들면 표시가 나니까 빌 나이라는 실제 배우를 이용하도록 했지만 사실 그 부분도 모두 CG 처리했다. 이런 것들이 경쟁회사에서도 제법 반향을 일으켜서 ILM이 자신감을 되찾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