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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함과 자기 연민에 빠진 한국의 남자 아웃사이더들을 비판한다

지금 남자들이 운다. 아프니 어루만져달라고 울고, 가족을 부양하느라 힘이 부치다고 운다. 어른의 자리로 가지 않고 아직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엄마를 찾는 이 아웃사이더들은 관객에게 연민을 요구한다. 충무로 남성, 또는 건달영화는 이렇게 몇년째 성장을 거부하고 가족의 바람막이 뒤에서 징징거리는 남자들을 봐달라고 호소한다. 이들은 사회에 저항하지도, 공동체에 대한 연대의식을 느끼지도 않으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느끼지도 않은 채 기존 도덕의 가치 속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그 폭력의 질서 안에 뭉개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항변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들은 연민이 가는 아웃사이더도 아니고 반항아도 아니며 기껏해야 순응주의자이고 여성을 자기 존재의 증명에 이용하려는 어린아이들이다. 남다은, 김지미 평론가가 지금 퇴행 중인 한국 남성영화의 기이한 성장통을 짚었다. 마지막으로 이종도 기자의 한국영화 속 찌질한 남성상 천태만상이 이어진다.

한국영화여, 연민의 최면에서 깨어나라!

2004년, 허문영은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먼 길을 걸어온 소년은 이제 막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경과했다. 어디에선가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겠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그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돼야 할 것이다. … <바람난 가족>의 성공 사례는 이미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이 어른이 돼가고 있다는 징조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렇게 한국영화는 홀로 남겨진 소년들을 서서히 떠나보내고 있다.”(<씨네21> 446호)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놀랍게도 소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시련을 경과”한 소년들이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는 길마저도 버리고 연마한 것은 그런 자신들을 불쌍해하며, 정확히 말해, 스스로를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며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무는 법이다. 머물기 위해서는 시간과 현실의 흐름,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신의 변화를 부정하거나 못 본 체해야만 한다. 이것은 분명 퇴행이고 나쁜 선택이다.

‘사람냄새’, 신파의 모호한 마취제

아버지의 부재, 여성의 부재, 공동체로부터의 분리처럼 허문영이 지적했던 2년 전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상황설정이 별다른 사유없이 하나의 장르가 되어 영화적 클리셰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지적할 만한 문제다. 그러나 지금 가장 이상한 것은 영화 안과 밖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민의 최면, 즉 자기 연민에 빠진 남자들을 연민하게 만드는 최면이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이 남자들이 과연 연민의 대상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건 달리 말해,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믿는 이들이 정말 불쌍한 위치에 있는가에 대해 되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다른 하나는 연민이라는 행위 혹은 정서 자체의 윤리에 대한 의문이다. 연민이라는 것은 혹시 무엇을 감추기 위한 우회로가 아닌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없이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는 “사람냄새”에 대한 호소만을 받아들인다(이를테면 김영진은 <열혈남아>를 평하며 “건달이 등장하는 영화 가운데 이만큼 사람냄새 나는 영화가 몇이나 있었는지”라며 지지를 표한 바 있다). 사실은 이 모호한 “사람냄새”의 신파가 마취제가 되어 소년성의 성장을 마비시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주먹이 운다>

<라디오 스타>

남자들의 자기 연민이 드러나는 양상은 크게 두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비루한 남자 건달의 장르를 취하는 영화들의 경우다. 이 영화들은 대개 (유사)가족적 틀 속에 자리한다. <주먹이 운다> <비열한 거리> <열혈남아> 등에서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들은 가족적 결핍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면죄부를 얻는다. 가장 흔한 건 가난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남자, 가족에게 버림받은 남자, 혹은 죽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남자의 형상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쉬운 선택은 ‘어머니’에 기대는 것이다. 여기서 폭력성과 순수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인물들이 스스로를 연민하고 보는 이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은 그 순수함을 폭력으로 전환시킨 이유를 외적 환경에 둘 때이다. 개인의 책임은 사라진다. 또 다른 하나는 건달도 아니고 잘나가지도 못하는 남자들을 다루는 경우다. <라디오 스타>의 최곤이나 <싸움의 기술>의 병태,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의 철동, 동현 등과 같이 자기만의 세계에서 이상한 방식으로 인정투쟁을 벌이는 남자들이 있다. 그런 인정에의 욕망은 세상과의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무지해 보일 만큼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는 이 남자들의 언어나 행동은 ‘날 좀 봐줘’ 식의 유아적인 칭얼거림을 넘어서지 못한다.

어른의 세계로부터의 아웃사이더

어쨌든 위의 두 경우 모두 남자들은 체제의 중심에 존재하지도 않고 완벽한 가장의 이미지를 갖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이 남자 아웃사이더들의 계보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처럼 보인다. 생물학적 아버지의 부재를 채워주는 유사 아버지들의 넘쳐남, 부서진 가족의 형상, 사회현실로부터의 거리 둠,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자기 연민의 정서가 유독 한국영화에서만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남자 아웃사이더들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아웃사이더인가? 예컨대, <배트맨> <스파이더 맨> <헬보이> 등에서 남자 아웃사이더들은 체제의 아웃사이더지만(물론 앞의 두 영화에서 남자들은 인사이더이자 아웃사이더이다) 그러한 위치는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부여된 운명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선과 악 사이, 혹은 영웅과 평범한 인간 사이에서의 개인적 고뇌가 담겨 있지만, 이것은 자기 연민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최근 일본의 아웃사이더를 대표하는 오다기리 조의 출연작인 <메종 드 히미코> <박치기!> <빅 리버> 등을 보아도 아웃사이더들은 대체로 현실적 조건 혹은 모순을 체현하는 존재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을 배제하는 사회에 정면으로 저항하지는 않아도,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해 신파에 기대지는 않는다. 일련의 한국영화들이 결국은 통합된 과거의 기억이나 가족으로 회귀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들은 현재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이야기를 닫는다.

한국의 남자 아웃사이더들은 오히려 20년 전 홍콩 누아르의 반영웅들을 연상시킨다. 남자들만의 의리와 피비린내나는 관계에 모든 것을 건 이 장르는 지극히 마초적이지만 적어도 유아적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판단이 단지 장르의 아우라에서 비롯된 것일까?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둔 홍콩의 미래가 투영되어서인지, 이 남자들은 소년성보다는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만개한 남성성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에는 (행위의 윤리성과는 별도로) 모든 행위의 책임을 홀로 지고 가는 단독자적인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 연민을 철저히 감춤으로써 오히려 보는 이의 파토스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택한다. 물론 이것도 여전히 남자의 자기 연민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홍콩 반환 이후 부활한 누아르, <무간도> 시리즈에 이르러 홍콩의 남자 아웃사이더는 한발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남성적 의리보다 돋보이는 건 분열하는 아웃사이더의 고통이다. 그들은 남성적 공동체의 논리와 모순을 동시에 체현하며 개인적 정체성의 문제에 마주친다. 이들이 아웃사이더인 이유는 집단을 선택하거나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체제 안과 밖의 경계에 위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고민은 자신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간다.

<비열한 거리>

<열혈남아>

위의 경우들과 비교해볼 때, 이 시대 한국의 남자 아웃사이더들은 ‘어른의 세계’로부터의 아웃사이더다. 이들은 아예 성장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장영화의 장르적 틀 내에서 설명할 수 없다. 전능하고 완벽한 가장-남자로서의 형상은 자기 연민에 빠진 비루한 남자의 형상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나 완벽한 가장의 이미지 속에 이미 내적 분열이 존재했듯, 이 비루한 남자의 나약함은 사실, 그 반대의 효과를 감추고 있다. 공동체에 대해 발언하지 않고 적자생존의 논리에 내던져진, 생존에 급급한 남자들의 자기 연민은 어찌 보면 교묘한 술책이다. 이들을 다룬 영화들을 자세히 보면, 이 남자들은 여전히 여자를 교환의 대상으로 삼고 동성애적 욕망을 억누르며 동성사회적 욕망을 추구한다. 그들은 폭력적인 남성 질서의 희생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상징계의 법칙을 내면화하고 공고히 하는 존재들이다. 투덜거리거나 싸움하는 법밖에 모르는, 정치의 부재와 경제적 빈곤 앞에서 더이상 할 일이 없어진 이 남자들은 무력하다. 그 무력함이 자기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인간미’의 정체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무력함이 자기 연민으로 이어진다면, 그 어디서도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현실적 조건에 눈을 감게 하고 모든 것을 개인적 차원 안에 가두며,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면해야 할 수치심과 죄의식을 봉합해버린다. 이 남자들의 무력함과 자기 연민에는 자기 반성이 부재한다. 그 결과, 하루는 연민에 호소하고 하루는 명령에 복종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하루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치국(<열혈남아>) 같은 남자들의 납득할 수 없는 행위가 재생산된다. 남자들의 무력함과 자기 연민은 가부장제를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영리한 전략으로 자리잡는다.

타자는 없다, 자기 연민만 있을 뿐

그러므로 나는 앞서 언급한 영화 안과 밖을 묶어주는 ‘연민의 최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무기력한 남자 인물들의 자기 연민은 말 그대로 자기도취적인, ‘자기’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 이들의 성장여부는 이들이 그 연민을 ‘타자’에 대한 연민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들의 호소에 정서적으로 동화되어, 그들을 연민하는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 사실은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연민에 불과함을 깨달아야 한다. 모순된 논리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연민을 동시에 사유하지 않고서는 최근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연민의 최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 나온 영화 중, <괴물>의 강두와 <해변의 여인>의 중래는 가장 인상적인 남자들이다. 자기 연민에 빠질 틈도 없이 비루하지만 어쨌든 끝까지 행동하여 이상한 연민을 이끌어내는 남자(강두)와 끝까지 관객의 연민을 차단하지만 스스로는 자기 연민의 끝을 차라리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남자(중래). 불행하게도 지금 나는 이 남자들을 최근 한국영화 속 남자들의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