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 상처, 짐까지 모두 끌어안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부담의 무게가 큰 사람이라면 더욱 힘들 터.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의 두 주인공 인구(한석규)와 혜란(김지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각 약사와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들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별 문제없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살아간다. 인구는 정신분열증과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형 인섭(이한위)의 존재 때문에 사귀던 여성과 헤어진 경험이 있고, 혜란은 아버지가 ‘물려준’ 빚 수억원을 갚아야 하는 형편이다 보니 남자를 사귀는 일은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구와 혜란이 때로는 자연스럽게, 때로는 비현실적인 우연으로 마주치면서 따사로운 감정을 쌓아감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좀처럼 평행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그 무게 때문이다.
수시로 행방불명되는 형을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매야 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응석까지 받아줘야 하는 인구나 빚쟁이들의 지긋지긋한 독촉에 시달리는 혜란이나 딱해 보이는 건 매한가지다. 그들이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건 그들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아니 선택할 수 없었던 가족이라는 징한 이름에 짓눌린 삶은 얼마나 가련한가. 부당하게까지 느껴지는 가족의 부담은 때로 히스테리를 만들어낸다. 혜란이 임신 사실을 통보하며 먼저 결혼하겠다는 동생에게 “지워, 애 떼라고!”라며 날선 목소리로 말하거나 인구가 증상이 악화된 형을 붙들고 울부짖는 것도 억눌렸던 억울한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했기 때문이다. 이 심란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과연 가족이 얹어놓은 짐을 덜어내고 아무런 부담감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할 때…>는 오랜만에 만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멜로영화다. 극적인 순간이나 로맨틱한 상황이 거의 없는 대신 이 영화에는 삶과 사랑에 대한 조용하고 끈기있는 응시가 담겨 있다. 가족사의 넝쿨에 뒷발이 걸려 있는 채로 서로를 향해 조금씩이나마 발돋움하려는 인구와 혜란의 모습은 어느 정도 극단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허황되지는 않다. 둘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치명적인 게 아닌 탓에 심심한 맛으로 다가오지만, 지둔(遲鈍)하지만 은근한 애정은 실제 삶에서 만날 수 있는 익숙한 맛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멜로드라마 한가운데 가족이라는 주제를 던져넣고 정면승부한다는 점이다. 인구와 혜란이 가족에게서 입은 상처는 곧바로 그들이 사랑에서 입은 상처와 맞닿아 있다. 그들이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존재 때문이며, 결국 그들은 가족과 사랑,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사랑할 때…>는 이 대립돼 보이는 두 항목의 화해를 꾀한다. 명시적으로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결국 그 대립항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사랑을 모두 인정해야 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영화는 역설법으로 말하는 듯하다. 인구가 산 정상에서 내뱉는 “에이, 씨팔 좋다”는 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는 이 가족과 연애의 상관관계에 대한 기분좋은 깨달음처럼 들린다.
이 영화가 <8월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단지 한석규와 이한위가 출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약사 인구가 사진사 정원과 닮았거나 심심할 만하면 약국과 사진관 안에 떡 하니 앉아 있는 혜란과 다림이 비슷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두 영화는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점뿐 아니라 자그맣고 섬세한 디테일이 도드라진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사랑할 때…>가 생동감있게 느껴지는 데는 분명 디테일에 힘입은 바 크다. 인구가 전 애인과 여관에 갔을 때, 옷을 벗던 전 애인의 스웨터 오라기가 브래지어 고리에 걸리는 것을 보면서 섹스를 포기하는 장면이나 인구의 약국에서 두 사람이 이별의 전조를 느끼고 있을 때 밖에서 들리는 희미한 싸움소리 등은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자아내고, 언어가 닿을 수 없는 모호한 느낌을 전달한다. 하지만 <사랑할 때…>는 혜란의 경찰서 신이나 자동차 극장의 화장실 앞 장면처럼 소소한 디테일 속에서 때때로 길을 잃는 듯 보인다. 헨리 비숍의 <즐거운 나의 집> 또한 이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노래인 것은 틀림없지만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강조되는 탓에 결정적인 순간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다.
<사랑할 때…>를 보며 지독하게 로맨틱하지 않다고, 너무 어른스럽다고 불평하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영화 속 사랑이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마다 등짐을 짊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상대방까지 거드는 수고를 감수하고도 열심히 사랑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변승욱 감독의 데뷔작 <사랑할 때…>는 “그냥 서로를 사는” 커플들에게 위안을 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