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에로틱한 분위기의 철학적인 질문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

에로틱한 분위기 속에 철학적인 질문들이 던져진다. 하지만 분위기만 감상해도 상관없다.

욕망의 통로는 시선이다. 아들의 여자와 불륜에 빠지는 작가 다니엘 볼탄스키(다니엘 오테유)의 욕망이 흘러가는 궤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다니엘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다. 폴란드계 프랑스인인 작가 다니엘은 20여년간 세르쥬 노박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 몰래 참석한 그는 도서관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한다. 인물들을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고 그가 바라보던 여인과 눈이 마주친다. 다니엘은 외도하던 그 여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을 ‘두려움과 전율을 느꼈다’라고 기록한다. 훔쳐보던 주체가 훔쳐보는 대상으로 전환되면서 두려움과 전율이라는 양가적인 반응이 생겨난 것이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은 팜므 파탈이 등장하는 누아르영화이면서 작가의 존재론을 묻는 예술가 영화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의 영어 제목은 ‘기묘한 범죄’(Strange Crime)이고, 불어 제목은 ‘욕망의 대가’(Le Prix du Desir)이다. 전혀 달라 보이는 이 제목들은 작가, 욕망, 죄의식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각각 표현하고 있기에 영화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다.

도서관에서 나온 다니엘은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는 배를 타고 거기서 다시 한번 그의 시선은 고정된다. 다니엘의 시선을 붙든 것은 하늘거리는 시폰 원피스를 입고 있는 밀짚 빛깔 머리칼을 가진 밀라(안나 무글라리스)이다. 서로를 원하는 시선을 교환한 둘은 나폴리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다니엘은 “여기까지야”라고 짧은 일탈의 한계선을 분명히 긋지만, 다음날 결혼식장에서 아들 옆에 서 있는 밀라를 보고 혼란에 빠진다. 결혼식 뒤 기념촬영을 할 때 다니엘은 슬그머니 빠져버린다. 아내, 아들, 밀라와 나란히 서 있을 수 없었던 다니엘 대신 밀라의 친구 에바가 사진 프레임 안으로 뛰어들고 사건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한 식구가 된 밀라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다니엘과 달리 밀라는 거침없이 다니엘을 유혹한다. 이성으로 욕망을 억압하던 다니엘은 결국 밀회 장소를 불러주는 밀라의 일방적인 전화를 받고 그녀가 말한 주소로 찾아간다. 빈집에서 벌이는 다니엘과 밀라의 정사신은 필름 누아르로서 이 영화의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다. 책상 위에서 벌이는 두 사람의 정사를 지켜보는 카메라는 격자무늬 창밖에 있다. 창틀을 통해 훔쳐보는 카메라와 달리 소리는 닫힌 창을 넘나든다. 빗소리와 주제를 반복 연주하는 피아노 선율과 농밀한 신음소리가 뒤섞인 이 장면은 관음(觀淫)이자 청음(聽淫)이다. 훔쳐보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은 관음에 동참하게 되고 이런 동참 행위는 욕망에 이끌리는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게 만든다. 필름 누아르는 결국 욕망이 추동하는 힘에 손쓰지 못하고 이끌리는 인간이 다다르게 되는 파국의 종말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러한 욕망이 가장 극적으로 구현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정사신은 그래서 파국을 향해 내리막길을 걷게 될 인물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순간이다. <보디 히트>의 윌리엄 허트와 캐서린 터너가 벌이는 정사가 그랬듯, 이 밀회는 다니엘을 추락의 길로 이끄는 정점이 된다. 아들의 연인인 줄 모르고 처음 밀라와 만나 벌인 정사와 이 밀회는 의미가 다른 만큼 화면에 보이는 방식도 다르다. 그 차이는 고급 호텔의 편안함과 빈집이 주는 긴장과 불안함에서 온다.

다니엘의 도덕성은 두번 시험대에 오른다. 밀라와의 관계가 다니엘의 내면적 도덕률을 훼손하는 사건이라면, 오래전 자살한 다니엘의 친구 폴의 원고를 도용했다는 의혹은 작가적 도덕성에 손상을 주는 스캔들이다. 에바는 이 두 가지를 빌미로 다니엘을 협박하고 돈을 요구한다. 다니엘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세르쥬 노박임을 밝히고 의혹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해명하지만, 결백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바에게 돈 가방을 건네준다. 그것을 본 친구이자 변호사인 다비드는 다니엘에게 질문한다. “자네가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아는가?” “나도 모르겠네”라는 다니엘의 대답은 욕망을 따라 전진했던 인물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고백이다. 다니엘은 옛 친구 폴의 행적과 자신을 협박하는 존재를 밝히고자 고향을 방문한다. 그의 이 겨울 여행은 세르쥬 노박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의 제목 <겨울여행>과 겹쳐지면서 감춰진 과거와 현재의 비밀을 들춰내는 계기가 된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의 결말은 중층적 구조로 이루어진 진실이 한겹씩 벗겨지면서 반전에 반전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실은 도덕적 경계선이 어디인가, 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것은 성적인 문제뿐 아니라 작가적 양심에 관해서도 해당되는 질문이다. 밀라의 정체는 한번 밝혀지고 다시 뒤집힌다. 또한 다니엘과 폴 사이의 진실도 뒤집히고 뒤집힌다. 그러나 그런 반전을 향해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가다 마침내 폭발적인 힘으로 분출되는 헐리우드식 영화는 아니다. 눈치있는 관객이라면 예상할 수 있는 결말보다는 장르가 변주되면서 인간의 욕망, 작가의 욕망이 뒤섞인 실존적 질문들을 던지는 프랑스식 분위기가 더 인상적인 영화이다. 여기에는 주연을 맡은 다니엘 역의 다니엘 오테유와 밀라 역의 안나 무글라리스의 역할이 크다. <마농의 샘> <여왕 마고> <제8요일> 등에서 호연을 보여주었던 다니엘 오테유는 익명의 삶에서 빠져나와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 중년 작가를 특유의 분위기와 표정으로 연기한다. 샤넬의 수석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발굴한 모델 출신 안나 무글라리스는 볼륨있는 몸매의 팜므 파탈이 아닌 가느다란 실루엣에 사람을 잡아끄는 눈빛을 가진 새로운 팜므 파탈상을 보여준다. 누아르영화에서 팜므 파탈은 그 매력이 치명적일수록 이야기에 설득력이 생긴다.

2004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은 이탈리아계 프랑스인 로베르토 안도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다. 페데리코 펠리니,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의 조감독을 했던 로베르토 안도는 1980년부터 연극연출과 영화기획을 해오면서 연극쪽에서 더 인정받은 인물이다. 잔 모로가 출연한 2001년 데뷔작 <왕자의 원고>로 ‘다비드 디 도나텔로 영화제’에서 최우수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두 번째 연출작인 이번 영화에서 감독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욕망이 흘러가는 시선을 포착하는 데 솜씨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화면 속에 말없이 교차되는 시선들을 좇아가다보면 어느덧 관객의 겨울여행도 마감된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