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시선>은 옴니버스드라마이며 12세 관람가이고 기획·제작은 국가인권위원회다. 사실 내가 가장 기피하는 조건들을 두루 갖춘 영화다. 옴니버스는 뭐 취향이라고 하더라도 연령대도 그렇고. 제작사도 뭐 딱히…. 그러나 이 영화를 이 시점에서 보고 쓰고 싶었다. 온 나라가 부동산으로 뒤집혀, 택시를 타도 기사가 길가의 아파트 가격을 줄줄이 꿰고 있고, 인터넷 창은 명품 아파트 광고로 창대하고, “원고 쓸 시간에 차라리 재테크했으면 그렇게 먼 데서 출퇴근할 필요없지!”(난 서울에서 떨어진 아파트 아닌 곳에서 산다)라며 날 가엾게 여겨 충고하는 친구도 있었다(물론, 이제 더이상 친구가 아니다).
이렇게 부동산을 가장 요동치는 동산으로 만들어버리는 지겨운 재테크 세력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나누는 것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부동산 미래시세 예측과는 다른 미래를 생각하고 완료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특정한 종류의 영화들은 여기에 적합한 매체로 보인다. 90년대 후반 여성, 퀴어, 인권, 노동영화제들이 영화라는 재현의 장 속에서 인정투쟁, 권리투쟁을 꾸준히 시도해왔기 때문이다. 80년대 거리시위의 에너지가 스크린으로 전이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 나라가 집단적 광기와 투자에 매달려 있을 때, 그래서 소외층은 더욱더 두터워질 때 삶의 다른 비전을 영화를 통해 보고 확인하자는 것이다.
출구없는 판타지 <잠수왕 무하마드>
<세번째 시선>에선 7명의 감독이 6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반변증법>(2002), <자본당 선언: 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2004)의 김곡·김선 감독이 다섯 번째 이야기 <Bomb! Bomb! Bomb!>을 공동 연출했다. 현재 한국사회 인권의 전위는 서구적 자유주의 인권론이 옹호해온 시민, 국민의 정치적 권리가 배제한 그리고 그 외부에 있는 장애인, 어린이, 동물, 청소녀·청소년, 이주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무순임)라고 볼 수 있다. 이중 동물에 대해 조금 언급하자면 11월3일자 <한겨레> 교육 섹션에서 백화현 선생이 소개한 책 <개를 위한 변명>(유미디어 펴냄)에서는 시민민주주의의 권리의 개념을 동물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예컨대 “사람들을 성이나 국적, 출신으로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동물이라는 이유로 잔인한 도살과 사육을 받지 않아야 한다며 윤리적 채식주의를 주장했던 피터 싱어와 생명이 있는 삶의 주체로서 동물들의 권리를 주장한 톰 리건”과 같은 분석철학자들의 주장을 빌려서 말이다. 이 옴니버스에는 서운하게도 동물의 권리는 빠져 있지만 이주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청소녀, 성소수자 그리고 인종문제가 다양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중 정윤철 감독의 <잠수왕 무하마드>와 김곡·김선 감독의 <Bomb! Bomb! Bomb!>이 먼저 시선을 끈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정윤철 감독이 <말아톤>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곳이 안산 시화단지였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았고, 그를 통해 한국의 노동환경과 사회구조가 바뀌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고향 집에 전화를 하며 습기에 젖은 공중전화 박스 유리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무하마드를 밖에서 잡은 숏으로 시작하는 이 단편은 외국인 노동자의 인물 설정을 매우 독특하게 해내고 있다. 한국의 유독성 가스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는데, 사실 그는 고향에서 이름난 잠수부였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아침에 바다에 들어가 나오질 않아서 사람들이 죽었는가 짐작하고 있을 저녁때 물에서 불쑥 나와 놀라 물어보면, 그는 물속에서 좀 생각할 것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국의 한 오락 프로그램이 무하마드의 마을에서의 명성을 듣고 취재차 찾아간 적이 있었고, 위 내용은 그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진 것이다. 그런 무하마드가 환기 장치도 제대로 되지 않아 유독가스가 분출되는 공장에서 일하다 거리로 나와 수족관을 볼 때, 그리고 단속을 피하느라 공중목욕탕에 몸을 담글 때, 그 이미지는 고향의 바다로 이어진다. 물론 이렇게 현실과 환상을 직조해 일상에서 여러 가지 인종차별적 발언과 폭력에 노출된 무하마드의 다른 이면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관객에게 이주 노동자에 대한 감성적 이해를 하도록 만드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무하마드의 고향을 바다, 순수한 자연으로 그려 무하마드의 작업장과 대비시킴으로써 이 단편은 빠져나올 수 없는 이분법을 내장하게 된다. 자연을 떠나온 무하마드에겐 작업장의 현실과 고향에 대한 비현실적 기억만이 진동하고 있을 뿐이다.
계몽적이고 교조적일 필요는 없으나 인권 억압 사례를 영화화할 때, 그 억압을 진단한 뒤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좀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는 변화의 실마리를 영화라는 재현, 현실의 재구성 과정 속에서 드러내놓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영화에서 관객의 위치는 무하마드의 바다에 대한 동경에 마음을 주고, 작업장의 현실에 분개하는 것 외에는 별 역동성이나 유동성이 없다. 그리고 예의 공중목욕탕에서 무하마드가 고향의 바다로 들어갈 때,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entine>이 나오는데 무하마드의 자의식이나 무의식보다는 감독의 자의식이 두드러지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 설정이다. 그 상황에 대한 아이러니적 언급이라기보다는 무기력한 동반으로 들린다.
부분적 저항으로서의 판타지 <Bomb! Bomb! Bomb!>
반면 <Bomb! Bomb! Bomb!>은 음악을 가장 역동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편이다. 마선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학교 친구들에게 엄청난 수모를 당한다. 마선은 별다른 행동도 말도 하지 않는 내성적인 학생인데 주변 아이들은 동성애 행위에 대해 정말 잘도 알아(그 지식은 다 어디서 생겼을까?) 그에게 온갖 상세한 증오의 언어를 퍼붓는다. 주인공 마선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쥐 죽은 듯 앉아 있어 답답하기 짝이 없을 때, 마선의 드럼 연주가 나온다. 밴드부 오디션, <미스 레볼루션>인가를 드럼으로 치는 마선은 경이롭다. 여기에 역시 오디션을 보러온 마택의 베이스가 더해지면서 영화는 두 청소년의 나름대로의 절창을 전한다. 마선의 동성애 행위를 언급하면서 그를 동물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학생들은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비/논리는 동성애와 여성성을 동일시하고 또 그것을 동물과 유사한 것으로 본다. 이들에게 유일한 규범은 ‘브라자를 차지 않는’ 아버지의 남성다움이다.
이렇게 만연한 비/논리적 폭력 속에서 마선과 마택은 드럼의 리듬과 베이스의 선율에 따라 가까워지는데, 음악 세계의 화음과 달리 학교의 일상에서 그들의 불협은, 학생들의 집단 언어폭력에 몰린 마택이 마선에게 혐오 발언(hate speech)을 하게 됨으로써 정점에 달한다. 그러다 마택이 교실 안에 감금된 채 언어 린치를 당하고 있는 마선에게 다가감으로써, 마선은 마택이라는 친구를 맞게 된다. “동물원, 동물원, 동물원!”을 외치는 집단 언어 폭행 쇼가 교실을 일그러뜨릴 때, 마선과 마택은 웃통을 벗은 채 연주를 하는 판타지로 이에 맞선다. <잠수왕 무하마드>가 출구없는 판타지를 보여주었다면, <Bomb! Bomb! Bomb!>은 부분적 저항으로서의 판타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소녀 가장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소녀가 사라졌다>의 주인공은 가장(집안의 어른)이라기보다는 부모를 잃고 혼자 사는 청소년인데, 사회적 보호 대상으로 접근하는 시각을 어느 정도 비껴간 것은 정치적으로 새로운 올바름으로 보이지만, 마지막의 곰 설정 장면은 어리둥절하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의 호랑이를 연상할 수도 있으나, 그리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이미연 감독의 <당신과 나 사이, Gap>의 문제제기는 충분히 공감이 가나 계몽적인 방식으로 비계몽적인 면이 더 많은 아내와 남편의 구조화된 일상의 갈등을 다뤄 다소 평이한 TV드라마같이 읽힌다. 홍기선 감독의 <나 어떡해>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애환을 절절하게 그린다. 정진영의 정성스러운 연기가 영화를 살린다. 그러나 역시 닫힌 결말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감정적 윤리성이 성경책으로 표현되는 것은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험난한 인생>에서 제기된 10살 아이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벌써 지독하다. 어법이 얼마나 미국의 것과 닮았는지…. 이와 같은 인종갈등 재현은 앞으로가 험난해 보이긴 하지만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다루지 못한다. 역시 마지막 주제가처럼 쓰인 노래 <색깔이 없었으면 좋겠네> 등은 차별 철폐가 인종, 계급, 젠더 차이의 소멸, 차이의 정치학의 무의미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좀 문제적이다. 즉 기존의 인간다움을 구성해온 “백인, 남성, 시민, 국민”을 철저하게 해체한 뒤 인권의 의미를 재구성해야 하는 차이의 정치학에 입각한 ‘포스트-자유주의 인권영화’로서는 생각이 좀 못 미친다. 소재는 인종문제를 다루었지만 그것을 다루어내는 시각은 자유주의 인간론에 가깝다.
당신의 네 번째 시선이 궁금하다
그러나 이 모든 좋고 싫은 점에도 불구하고 <세번째 시선>을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위에서 나의 시선을 더해 이렇고 저렇고 평을 한 부분은 당연히 참고로만 삼아주실 것이며, 내가 더 알고 싶은 것은 영화에서 제기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당신의 네 번째 시선이다. 이 영화는 그 시선을 위한 6개의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