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멧돼지 박제
멧돼지를 잡을 생각이었다. 태릉 소품실 장석훈씨와 그의 조수들은 <괴물> 시나리오를 읽고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강두(송강호)가 딸 은서(고아성)에게 휴대폰을 사주려고 푼돈을 모아 넣어두었던 사발면 그릇이 ‘야생 멧돼지 박제 뒤에 숨겨져 있다’고 책에 쓰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강원도에 있는 식용 멧돼지 농장을 찾아가서 못 쓰는 멧돼지 머리를 구했다. 소품실에서 손수 도전한 박제 작업이 만만치 않아 농장 소개로 전문가의 도움을 구하게 되었는데 할머니 전문가 왈, “야생 멧돼지는 이리 안 생겼습니다”. 야생 멧돼지와 식용 멧돼지는 “털부터 다르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4시간이나 걸려 찾아간 농장에서 구한 머리는 결국 폐기처분했다. 진짜 야생 멧돼지를 잡아야 했지만 야생동물 박제 자체가 법으로 금지돼 있어 그 또한 시작부터 불가능했다. 소품실은 결국 전문가에게 제작 전체를 의뢰하기로 방법을 바꾸었다. <괴물>에 등장했던 이 무시무시한 야생 멧돼지 머리 박제는 머리 가죽 샘플을 갖고 전문가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박제는 창고 구석 높다란 천장에 위협적으로 매달려 있다가 직원의 손에 의해 지상 취재진에게 공개됐다. 온통 뽀얗고 흐릿하기만 하던 멧돼지 머리를 마른걸레로 살살 닦으니 검고 선명한 눈알이 번뜩, 번뜩 나타났다.
찐계란과 곶감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가짜일까. 왼쪽이 진짜, 오른쪽이 가짜다. 왼쪽의 계란은 날계란을 그대로 쓸 수 없어 쪄넣은 것이고, 오른쪽의 곶감은 화면 전경이 아닌 원경에 걸릴 소품이라 가짜로 만든 것이다. 진짜 감을 2천여개 깎았는데, 가짜 감도 그만한 양을 준비했다고. 스티로폼을 잘라 모양을 내고 색을 입혔다. 소품실의 어린 여자 스탭이 만든 이 모형 감을 두고 김호숙씨는 “이게 실물로 보면 그저 그렇지만 화면으로 보면 무지 예쁘다. 진짜 감보다도 더 먹음직스럽게 나왔다”고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계란은 찐 지 한달 됐다. “큰 문제가 없는 한 다른 영화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해지금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
대형 화투패
타짜들의 기술 전시만큼 영화 <타짜>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화투패의 클로즈업이다. 그런데 실제 화투패는 크기가 너무 작아 카메라로 클로즈업을 하는 데 무리가 있다. 이 때문에 파주 소품창고 유청씨는 동일 재료로 약 10배의 확대본인 대형 화투패를 만들었다. 재료는 공장에서 구했고 제작은 아크릴 강화업체에 맡겼다. 화투패 뒷면의 모양은 제작회사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그 표면을 고스란히 확대하기가 생각보다 까다로워 3~4번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육안으로 보면 어떻게 만들어야겠다는 걸 딱 알지만 정교해야 하니까 쉽지 않았다. 큰 화면에 이만하게 잡히는 건데 잘못 만들어지면 안 되지.”
청와대 경호실 엘리트복
청와대와의 전화통화 시도 4번째. 이제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 상대 때문에 ‘메탈자켓’ 설용근씨도 포기했다. <그때 그사람들>을 위해 청와대 경호실 제복이 6가지 종류로 필요한데 허가와 도움을 받고 싶어도 시도조차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청와대 경호실 복장 자료를 청와대에서 구할 수 없게 된 설씨는 무작정 청와대 근처로 나가 인근 가게들을 죄다 뒤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마크사’. 즉 유니폼에 다는 각종 마크와 배지를 취급하는 가게였는데 주인이 당시 관련 의상 하청업을 했었더랬다. 물론 ‘마크사’ 주인을 설득하는 데에도 며칠이 걸렸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우리 청와대 허가 안 받았고, 옷은 50벌 정도 제작해야 된다, 라고.” 필요한 배지와 마크를 “죄다 쓸어왔”지만 ‘청와대 엘리트복’이라 불리는 오른쪽 유니폼은 옷 샘플을 구할 수 없어 제작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설씨는 자주 들락거리는 인터넷 유니폼 동호회에 들어가 자신이 가진 제복 중에 사람들이 탐낼 만한 것을 내놓고 물물교환할 상대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차지철(한석규)의 가죽 제복상의와 카키색 엘리트복을 비롯해 6종 50여벌의 청와대 의상을 준비할 수 있었다. 동호회 회원과 맞바꿈한 오리지널 의상엔 ‘설용근’이라는 이름을 새로 수놓았다.
MSG-90 / PSG-1
<쉬리>에서 이방희(김윤진)가 저격용으로 사용했던 총이다. 기종은 MSG-90, 길이 120~130cm가량 되고 무게는 2~3kg 정도 나간다. 웬만큼 팔이 길지 않고서는 정확한 자세를 잡을 수도 없을뿐더러 자세를 잡는다고 해도 무거워서 총구를 받친 왼팔이 무너지기 일쑤라 다루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방희는 숙련된 간첩이라 이런 허점이 용납될 수 없고 총기를 능숙히 분해·조립할 줄도 알아야 한다. ‘메탈자켓’ 설용근씨가 회고하기로 김윤진은 몇번의 레슨을 거친 다음 어렵지 않게 MSG-90의 분해·조립을 터득했다고 한다. 여자에게는 다소 버거운 무게에도 잘 적응했다며 “아주 잘하셨던 분”이라고 칭찬을 덧붙였다. 모조 총기는 부속품 교체나 재조립 등으로 기종을 바꾸는 것이 가능해서 이방희 총은 현재 PSG-1 기종으로 둔갑했다. 그동안 수차례 모습을 바꾸며 <킬러들의 수다>를 비롯, 다른 영화들과 뮤직비디오 등에 여러 차례 출연했다. 수백정의 모조 총기들 중에서도 이 녀석이 유난히 주인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버렸다가 되찾은 자식’이기도 해서다. “한동안 일감이 안 들어와서 돈이 없을 때 이 총을 동호회에 팔았었다. 한참 뒤에 중고 시장에서 우연찮게 발견했다. 딱 보니까 내 총이더라. 내가 다듬어논 게 있어서 금방 안다.” 설씨와 보낸 시간이 이제 9년이다.
카메라
<가발>에서 지현(유선)이 여동생 수현(채민서)의 머리통을 내려칠 때 쓰였던 소품이다. 투명한 비닐에 싸여 있을 때는 사진기자조차도 “저건 진짜 카메라네요?”라고 했을 정도로 감쪽같이 생긴 가짜 카메라다. 찔러보면 물컹하니 손가락이 푹 들어가고, 움켜쥐면 이리저리 모양이 뒤틀린다. 태릉 소품실 장석훈씨가 실리콘과 화공약품을 이용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진짜 카메라를 갖고 틀을 떠서 형체를 만들고 도색 작업까지 손수 했다. “유리재떨이 만들었던 재질과 똑같은 것”이라고 장석훈씨가 설명하기에 “<넘버.3>의 그 유리재떨이냐”고 반문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돈
고니(조승우)가 돈다발에 석유를 끼얹어 불태울 때, 기차에 매달린 고니의 배낭에서 돈다발이 공중으로 흩날릴 때 관객은 그것이 가짜 돈인 줄 알면서도 내심 가슴아팠을 것이다. <타짜>에 쓰인 이 그럴듯한 돈 무더기는 파주 소품창고 유청씨가 인쇄업체에 의뢰해 준비한 소품이다. 클로즈업으로 잡힐 수 있음에 대비해 정교하게 인쇄한 것들은 얼핏 육안으로 보면 진짜 돈으로 착각하기 쉽고, 그보다 하급으로 인쇄된 지폐들 역시 50cm 떨어져서 보면 그럴듯하다. 액면가 쳐서 1만원권 90억원, 수표까지 합하면 총 120억원어치의 돈이 제작됐다고 한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최동훈 감독의 전작 <범죄의 재구성> 때 쓰였던 가짜 돈다발과 뭉텅이의 백지들이 동원됐다. 이 돈에는 장마다 ‘영화촬영소품’이란 붉은색 글씨가 중앙에 박혀 있지만 엄밀히는 위조지폐다. 창고에 고이 보관돼 있으나 곧 폐기처분할 예정이라고 유청씨는 말한다. “젊은 사람들이야 금방 구분하지만 시골 어르신들은 다른 돈하고 대충 섞어주면 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르실 수도 있다.” ‘120억원’을 인쇄하는 데 든 돈은 1400여만원. 100만원, 1천만원짜리 수표보다 1만원권 인쇄에 든 비용이 훨씬 많았다. 컬러 잉크값, 양면인쇄 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이긴 하다.
등잔대
“<웰컴 투 동막골> 때는 희한한 거 진짜 많이 만들었어요. 영화 자체가 특이하고, 얼토당토않은 설정도 많잖아요.” 태릉 소품실 ??씨가 꺼내 보인 물건 중 하나는 총으로 만든 등잔대다. 영화에서 남한군과 북한군이 동막골 이장님에게 무기를 빼앗긴 뒤 마을 사람들은 그 무기를 갖고 생활용품을 만든다. 총으로 만든 등잔대도 그런 설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얼핏 보면 무슨 특이사항이 있을까 싶지만 등잔대 아랫부분이 총 개머리판 모양이다. 나머지 부분은 모두 나무로 깎은 것이지만 개머리판 부분은 진짜 개머리판으로 만들어진 것. 황학동에서 옛날 총을 구입해 부러뜨려서 쓴 것이라고 한다. 그런 수고를 들이느니 나무로 개머리판 모양을 만드는 게 낫지 않느냐고 묻자 되돌아오는 대답. “그게 더 힘들죠. 나무를 깎는 건데.” 개머리판 등잔대와 함께 수류탄 등잔도 만들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며 ??씨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게 진짜 맞춤형 소품인 셈이죠. 다른 영화에선 쓸 수 없는 거니까.”
김일성, 김정일 사진
당신은 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국경의 남쪽>에서 북조선인 김선호(차승원)와 그의 가족이 북한 고향집에 늘 걸어두었던 두 지도자의 사진들은 진짜 북조선의 때가 묻은 물건들이다. 유청씨는 중국의 지인에게 수소문해 이 물건들을 사들였다. 고 김 주석의 사진은 영화 속에서 북한 최대의 행사인 태양절 때 광장 앞에 크게 현시되기도 하는데 이 대형사진은 유청씨가 사들인 진짜 사진을 확대한 것이라고 한다. 어렵게 공수한 물건들이지만 현재는 폐기되어 창고에 남아 있지 않다고 유청씨는 설명했다. “법문제도 있고, 다른 영화들에서 자주 쓰일 소품도 아니라서 미련없이 폐기했다.” 여기 실린 사진은 파주 창고에서 원본 사진의 확대본을 찍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