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소품창고가 궁금했다. 저 안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건들이 숨쉬고 있는 것일까. 먼지가 내려앉은 소품을 닦아내면 스크린에서 미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 주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먼저 남양주 태릉 소품실과 파주 소품창고를 찾았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두명의 소품지기를 그곳에서 만났다. 소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현재를 들었더니 이번엔 과거가 궁금했다. 이어 남양주종합촬영소 소품센터를 찾았다. 한국영화 소품 역사의 산증인인 3명의 소품지기들은 소품에 얽힌 웃지 못할 비사를 기꺼이 들려줬다. 흔히 볼 수 없는 소품의 소유자들도 궁금했다. 골동품 차들을 개조하고 각종 유니폼과 총기 액세서리를 만든다는 두명의 소품지기를 또 만났다. 고맙게도 7명의 소품지기들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것 말고 그들의 보물창고를 개방해달라는 부탁에도 기꺼이 응했다. 시간과 기억을 머금은 소품, 아니 대품창고를 여기, 최초 공개한다.
세상 모든 물건이 여기에소품창고를 찾아갈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 길눈이 밝거나 성능 좋은 네비게이션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개인 차로 가야 함은 필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 한다면 대략 낭패. 택시를 잡아탈 경우 몇 만원 들일 각오를 하자. 소품창고는 만만한 데에 있지 않다. 시 외곽으로 빠져나간 뒤에도 점점 차선이 좁아지는 길을 따라 비포장 도로를 밟고 벌판이나 숲으로 들어서야 한다. 다 왔다고 방심 말고 전화를 걸어 최종 확인을 거쳐야 한다. “지금 여기가 어디어디쯤인데 거기까지 어떻게 가면 됩니까?” 알쏭달쏭한 지시를 따라 조금만 더 파고들면 네모 반듯한 대형 컨테이너 가건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곳이 소품창고다.
대뜸 비가 내리기 시작한 추운 월요일, 남양주와 파주에 있는 소품창고 두곳을 연달아 찾았다. 이 두곳을 하루에 방문한다는 게 얼마나 미련한 계획이었는지 첫 번째 목적지인 남양주 소품창고에 도착하는 순간 깨달았다. 창고 주인이자 소품팀장인 장석훈씨의 안내에 따라 창고에 들어섰다. 얼핏 끝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깊숙한 곳까지, 높은 진열대들이 비좁게 늘어서 있다. 그것도 부족해서 물건들은 칸마다 암묵의 자리 싸움을 하며 빼곡히 쌓여 있다. 소품창고를 찾아갈 때 염두에 둘 점 두 번째. 무엇이 있을까를 따질 게 아니라 무엇이 없을까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 시대별로 TV와 비디오데크, 카세트데크, 선풍기, 각종 LP판과 CD, 비디오테이프들, 거울, 치약, 칫솔, 세제, 화장품, 입술보호제, 식용유, 간장, 식초, 프라이팬, 냄비, 솥, 그릇, 수저들, 80년대의 칠성사이다, 인형, 방향제, 상패, 장식물, 액자, 잡지, 각종 책들, 크레파스, 스케치북, 훌라후프, 가방, 이불, 스탠드 등에 이르는 생활소품들이 창고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다. 신분증과 이름표, 사탕과 캐러멜, 우편배달함과 각종 트로피도 있었다. 옆 창고에는 서류함과 책·걸상, 칠판, 분필, 탁자, 지게, 바구니, 갈퀴, 쟁기, 풍구 따위가 있다. 건너편 창고에는 가구류가 모여 있고, 길 건너편 창고에는 군사물품들이 모여 있다. 시체만 빼고 세상의 모든 물건이 이곳에 집합한 것 같다.
데뷔 못한 물건들도 수두룩
손때 묻은 생활잡화들이 일상 생활 외의 목적을 위해 한데 모인 광경은 암만 봐도 신기하다. 공산품 말고 임자가 명백한 물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창고 한켠, 조리실을 겸한 휴게실에서 장석훈씨의 아내가 소품실 식구들의 점심을 준비 중이다. 김치찌개 냄새를 맡다가 한쪽 벽 선반 아래칸에 얌전히 놓인 졸업앨범들을 발견했다. 1987년 00여자중학교 것을 비롯해 졸업앨범이 10여권이나 된다. “황학동에 매물 나왔을 때 한두권씩 사들인 것”이라고 장석훈씨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것들이 소품일 줄 상상하지 못했다.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지점토 장식물도 그 당시 누군가가 수업 과제나 방학 숙제용으로 만든 물건일 텐데. 유청씨가 운영하는 파주 소품창고에서는 1990년도판 ‘국민’학생용 <새국어사전>이 발견됐다. 책 아랫면에 검게 “6-1 문지혜”라고 적혀 있다. 사촌동생과 동명이다. 소품창고 안에 있으니 실제와 실제 아닌 것의 경계가 갈수록 흐려진다. 아무나 먹도록 식탁 위에 놓여진 하얀 떡조차 소품 같아서 집을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
창고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히 희소성 가치가 높은 물건들이다. 장석훈씨와 동업으로 남양주 소품창고를 운영하는 김호숙씨는 고급스런 광택을 뿜는 금빛 구식라디오를 가리키고 “제니스 거”라고 설명한다. “1950년대에 만들어져서 아주 부자들만 쓰던 귀한 물건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런 거 구하기 쉽지 않다.” 시대물에 쓰이기 좋겠다는 말에는 고개를 젓는다. “시대물 나름이지. 교수님이나 돈 많은 사업가 나오는 거 아니면 시대물이라고 해도 갖다 쓸 일이 없다.” 고상한 신분 때문에 제니스 진공관 라디오는 아직 영화에 출연하지 못했다. 절판된 의학서적 원서들, 195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가죽가방 등 희귀한 중고 매물들은 황학동, 인사동 주변에서 주로 구한다고 한다. 소품창고가 골동품점과 다른 점이라면 옛 물건의 종류와 가치를 따지지 않고 다 찾아나선다는 점. 생산 중단된 배터리 따위의 공산품도 이들에게는 귀한 골동품이다. “자주 거래하는 가게들은 먼저 전화를 주기도 하지만 일단 나가서 눈에 띄는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사가지고 온다. 나중에 구하려면 그게 더 힘들다.” 제니스 라디오 말고도 아직 데뷔 못한 물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파주 소품창고의 유청씨는 “1970~80년대 물건을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말도 한다. “우리나라가 원래 자료 정리 같은 게 잘 안 되는 나라라 어디 가서 옛날 거 뭐 하나 찾아보려고 해도 되게 어렵다. 근데 1970~80년대는 유난히 자료가 없다.”
찾을 땐 악착같이, 버릴 땐 미련없이
‘건어물’, ‘약재’. 겉면에 이렇게 쓰인 박스들이 남양주 소품창고 한 귀퉁이에 쌓여 있다. 설마 이게 진짜 건어물이고 진짜 약재? 그렇단다. 이 진짜 건어물과 진짜 약재는 노근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작은 연못>에서 시장 오픈세트 세팅에 쓰였던 소품이다. 얼마 전 촬영을 완전히 마친 소품들이 창고로 돌아와 쉬는 중인데, 당시 세트 모습을 설명이라도 하듯 건어물 박스 주위로 농기구와 피난 보따리, 군 물품 일부가 쌓여 있다. 약재 냄새를 부러 맡아보는 기자에게 김호숙씨는 “가짜가 더 비싸다. 이런 건 진짜를 쓰는 게 낫다”고 설명한다.
반면 진짜를 써서 애먹은 경우도 있다 한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 줄에 꿰어두는 단감들이 대량 필요해서 단감 2400개를 사다가 일일이 깎아 곶감 줄을 만들어놓았다. 촬영 전날 세팅을 하려는데 그새 감들이 익어 줄을 집어들자마자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져내렸다. “일주일 전에 만들어놨더니 단감이 연시가 돼 있더라. 그날 밤 2천개를 다시 만들었다.” 소품팀에게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무언가를 구해오는 일만큼이나 익숙하다. “시대물을 작업할 때 일에 대한 애착이 더 커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남양주 소품창고의 김영대씨는 말했다. “현대물은 사서 쓰는 게 많아서 소품에 정이 많이 안 간다. 시대물은 손수 만들어 써야 하는 게 많다. <웰컴 투 동막골> 할 때 등잔 하나 만드는 데만 3일이 걸렸다. 일은 더 힘들어도 애착이 안 갈 수가 없다. 그 심정은 만들어본 사람만이 안다.”
소품창고를 찾아갈 때 염두에 둘 점 세 번째. 소품창고는 소품팀의 전부를 대변할 순 없다. 파주 소품창고의 유청씨는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으로 <혈의 누>와 <국경의 남쪽>을 꼽으면서도 “창고로 가자”고 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주요 소품들이 창고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23명의 인력이 1주일간 제지소 세팅에 공들였던 <혈의 누>를 예로 들면 당시 제지소 안에 꼼꼼히 채워넣은 완성된 종이, 제작 중인 종이, 종이죽, 종이 원료인 당나무 등이 창고에 없단 뜻이다. 당나무 2.5t 트럭 1대 분량, 안동한지 1t 트럭 1대 분량, 당나무와 비슷한 뽕나무 대량, 안동한지처럼 보이게 염색할 폐신문 7t 트럭 분량을 제지소 안에 들여놓고 “영화 속에서 보여진 작업은 가짜가 아니라 실제 제지 작업과 완전히 똑같다”는 것을 강조할 만큼 공을 들였건만 소품에 미련을 두지 않은 건 “언제 다시 영화에 쓸지 보장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정신을 가진 창고 주인 유청씨는 비슷한 이유로 <국경의 남쪽> 때의 소품들도 대량 폐기했다. 베이징과 옌볜 등 중국 일대에서 현지인과 조선족들을 통해 가구, 그릇 등 실제 북한 사람들의 가재도구를 어렵사리 구해놓고 촬영을 마친 뒤 모두 버렸다. “일정이 촉박해서 정부 허가 못 받고 들여온 이유도 있지만 허가를 받았다 해도 그런 (특이해서 언제 쓸지 모르는) 소품들을 매번 창고에 모아두기엔 우리나라 땅값이 너무 비싸다.”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낡은 피아노도 그렇게 버려졌다.
이름도 몰라, 필모그래피도 몰라
요즘에는 미술팀에서 소품일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소품창고에 대여만을 의뢰해오는 영화 팀들도 많다고 유청씨는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체감하기로 50% 정도가 그렇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충무로의 소품 스탭들 가운데 가장 큰 창고를 운영하고 있고 실력이 유능하다 알려진 장석훈씨와 유청씨 모두, 언젠가는 소품 영역이 미술 영역에 흡수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청씨는 소품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빨리 정확하게 꼭 필요한 물건을 공수해오는 것”인데 “그건 웬만한 경력으로 쌓은 인맥과 감각이 아니면 절대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거느리고 있는 25명의 식구와 10년은 더 일하고 싶어한다.
두곳의 소품창고는 번듯한 이름이 없다. 남양주의 소품창고는 ‘태릉 소품실’이라고 불린다. 이유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창고가 태릉에 있었기 때문이다. 파주에 있는 소품창고 이름은 그냥 ‘소품창고’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집안 살림이 늘어가듯, 소품창고는 영화의 흔적들이 긴 세월 차곡차곡 쌓이는 공간이다. “천연사이다 빼고 다 있어요.” 영화 출연을 마치고 돌아온 배우들- 깨지지 않게 신문지로 포장된 병들이 박스 안에서 하나둘씩 나온다. 남양주 소품실의 두 스탭은 앉아서 마른걸레로 병들을 닦기 시작했다. 리스트를 확인한 결과 천연사이다 한놈만 빼고 무사히 돌아왔다. 병마개를 따지 않아도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면 내용물이 증발한다는 스탭 말에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떤 놈의 내용물이 1/3쯤 없어져 있다. 이 병의 필모그래피는 몇편이나 되는 걸까, 문득 궁금하다. 창고 주인도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이 무생물의 배우들. 그것들의 사연들. 파주의 소품창고 선반 구석에서 본 니베아 립케어가 떠오른다. 별 사연은 없을 거라 해도 묻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 소품창고에 번듯한 이름이 없는 게 당연하다. 어떤 근사한 표현을 쓰더라도 그 많은 영화의 기억들을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곳씩 갔어야 했다. 맘 먹고 찾아가지 않는 이상 쉽게 닿을 수 없는 외지고 한적한 데에 숨은 이야기 창고를 등지고 나오면서 또 한 번 후회한다.
“계속 일할 수 있는 것도 행복”
장석훈 ‘태릉 소품실’ 대표
장석훈 대표는 매우 과묵하다. 소품 일을 30년 가까이 해왔다고 하니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이거나 다 잊어버려 할 얘기가 없어서일 텐데, “글쎄, 그랬었나, 잘 모르겠다”며 내내 말을 감출 뿐이다. 대신 기자에게 묻는다. “남양주는 다녀오셨습니까? 거기 계신 분들이 제 스승님이신데.” 그는 남양주종합촬영소 내 소품센터에서 차순하씨와 김호길씨에게 소품 일을 배웠다.
창고 이사 중이라 물건들 정리가 덜 됐지만, 새로 옮긴 남양주 창고는 다섯 덩어리다. 마차 등 몸집이 크고 자주 쓸 일이 없는 물건들만 보관하는 창고 하나는 마석에 있다. 그는 20여명의 식구들을 데리고 소품실을 꾸려나가는 중이다. 소품팀을 별도로 필요로 하지 않는 미술팀들에게 소품 대여도 하고 있다. “옛날보다 작업 환경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 물론 요즘도 아주 좋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옛날을 생각하면 많이 발전한 거 같다”고 설명한다. “근데 일할 사람이 별로 없다. 이쪽 일은 남자가 많이 필요한데, 요즘은 소품 일 하는 젊은 남자들을 찾기가 어렵다.”
“실수랄 게 별로 없다. 현장에서 세팅하다가 생각나면 다음날 가서 새로 끼워넣기도 하고, 아차, 싶게 놓치고 간 것들도 물론 있지만 준비팀과 현장진행팀이 늘 따로 움직여서 그럴 일이 거의 없다”며, 장석훈씨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빈틈도 애써 내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으면야 나는 좋지.”
“후배들 때문에라도 잘해야지”
유청 ‘소품창고’ 대표
유청 대표는 이 일을 방송국에서 시작했다. 1992년 입사해 8년을 근무하다가 2000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계기로 영화계로 옮겨왔다. “어떤 공간을 세팅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방송은 시간 제약 때문에 불가능하다. 한번 촬영하고 철수했다 다시 세팅해야 하고, 그것도 한 장소가 아니라 엄청난 크기의 스튜디오 안에 꽉 찬 장소를 아침에 3∼4시간 만에 해야 한다. 영화는 세팅하는 데 하루도 해보고 이틀도 해보고 할 수 있으니까.” 가장 힘들었던 작업에 대한 말은 아낀다. “모든 작품이 다 힘들다. 어느 것 하나도 쉬운 작업은 없었던 것 같다.”
경영 사정이 좋지 않아 이사를 해야 했을 때 물건을 많이 버린 것이 아깝다면서도, 그는 학생들에게만은 무료로 소품을 대여해주고 있다고 한다.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려 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도 뭐라 할 순 없는 일이다.” 일반 상업영화는 자신이 스탭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대여는 의미가 없다. 같이 일하는 어린 친구들 때문에라도 내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들은 지금의 나를 보며 자신의 10년 뒤 모습을 상상할 것 아닌가.” 25명의 직원들에게 월급과 4대 보험을 보장해주는 살림도 쉽지는 않지만 가급적 그것을 유지하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앞으로 10년만 더 해도 좋다라고 생각하지만 20년까지 가면 정말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