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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영화가 아닙니다”
2001-09-20

미국 폭탄테러와 할리우드영화의 상관관계

마지막으로 뉴욕에 갔을 때, 세계무역센터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종일 건물 구경을 하고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길 건너편에 있는 세계금융센터(World Financial Center)의 겨울 정원(Winter Garden)이라는 실내광장을 한가롭게 거닐며 보냈었다. 물론 <킹콩>에서 킹콩이 매달려 올라가는 장면만으로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던 세계무역센터에 직접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대단히 흥분된 상태였던 것 같다. 여하튼 그뒤 약 1년9개월이 지나 내가 다시 세계무역센터를 보게 된 것은, 실물로도, 영화에서도 아닌 TV 화면을 통해서였다. 충격적인 것은 무의식적으로 보게 된 그 TV 화면 속의 세계무역센터가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는 점이다. 잠시 멈칫하다가 그것이 미국 <CNN>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나서 나는 거의 패닉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전세계인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불타고 있는 건물, 또다시 날아든 다른 비행기의 충돌 그리고 붕괴. 그렇게 이어진 일련의 영상들은 최첨단 특수효과로 만들어진 할리우드영화의 한 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CNN>이나 <NBC> 등의 뉴스앵커들은 “이것은 영화가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라는 멘트를 반복했고,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여기저기서 이번 사태를 영화와 비교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사실 <데블스 오운>이나 <크라잉 게임>과 같이 단순히 테러리스트가 나오는 영화들이 아닌, 이번 사태와 유사점이 있는 영화들을 꼽아보면 잘 알려진 것만 해도 10편이 된다. <에어 포스 원> <함정> <피스메이커> <비상계엄> <트루 라이즈> <파이널 디시전>(극장 개봉제목 <화이널 디씨젼>) 등이 그중에서도 가장 유사점이 많은 작품들.

우선 <에어 포스 원>에서는 비록 아랍계는 아니지만 러시아계 테러리스트가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납치하는 설정이라 이번 테러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에어 포스 원>에서는 대통령이 깡패(?)로 나오는 데 반해, 부시 대통령은 10시간 동안 잠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함정>의 경우 미국인 테러리스트가 치밀한 작전을 통해 펜타곤을 폭발시킨다는 면에서 이번 사건과 유사한 면이 있다. 영화에서는 다른 사람이 탄 자동차를 이용했다는 점이, 비행기를 이용한 이번 사건과는 다른 점이다. <피스메이커>의 경우 보스니아내전으로 가족을 잃고 국제사회에 증오를 갖게 된 인간적인 엘리트 테러리스트가 등장한다. 그는 엘리트라는 면에서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빈 라덴과 흡사하다. 하지만 폭발물을 담은 가방을 가지고 맨해튼에 있는 유엔건물을 폭파하려는 계획이 저지된다는 점은 영화와 다르다.

화학무기로 무장한 아랍계 테러리스트가 비행기를 납치해 백악관을 공격한다는 설정에서 <파이널 디시전>은 이번 사건과 거의 똑같다. 차이라면 화학무기가 아니라 비행기에 가득 실려 있는 연료가 무기로 이용되었다는 점 정도. 이번 사건과 유사성에서는 <비상계엄>도 뒤지지 않는다. 아랍계 자살테러집단을 진압하기 위해 미군이 맨해튼에 주둔한다는 내용이 그대로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 내 아랍인들이 개봉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을 정도로, 자살을 감행하는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의도를 전혀 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그렇게 아랍 테러리스트를 그냥 무자비한 악한(?)으로 그리는 데 있어서는 <트루 라이즈>를 따라올 영화도 없다. 이 영화에서 플로리다의 한 섬에 핵무기를 가지고 들어와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하는 아랍 테러리스트들은 희화화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말고도 톰 클랜시의 최신 소설들도 그 유사성으로 인해 많이 언급되었다. <적과 동지>(Debt of Honor)의 경우엔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극우적인 성향의 일본인 비행기 기장이 보잉 747기를 몰고 위싱턴 DC의 미 국회의사당으로 돌진하는 설정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 한편 현재 벤 애플렉을 알렉 볼드윈, 해리슨 포드에 이은 새로운 잭 라이언으로 내세운 또 하나의 잭 라이언 시리즈 <공포의 총합>(The Sum of All Fears)에서는, 유럽의 네오 나치계 테러리스트가 소련의 정치적인 혼란기를 틈 타 미국과 소련간 전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핵폭탄을 미국에 터뜨린다는 설정이 나온다. 물론 잭 라이언의 영웅적 행동으로 두 강대국의 핵전쟁은 피하게 된다는 내용. 내년 여름 개봉을 앞두고 촬영이 한창 진행중에 있으며, 모건 프리먼, 제임스 크롬웰도 출연중이다.

여하튼 이번 테러사건은 그렇게 ‘영화 속에서도 불가능했던’ 테러리스트의 미국 본토, 그것도 맨해튼과 워싱턴 DC의 공격이 현실화됐다는 점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극단적인 테러에 지지를 보내고 있는 수많은 아랍인들이 이른바 ‘집단 정신병자’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와 난민이 되고, 전쟁을 통해 가족과 동포를 수도 없이 잃은 그들에게 그런 지지는 마땅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테러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 논리로 미국의 무차별적인 보복공격 또한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부적절한 가정이긴 하지만, 만일 북한이 여기 관계되어서 미국이 즉각적으로 보복공격을 감행한다면, 그 고통을 맞아야 하는 이들은 대부분 테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우리의 가족과 동포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CNN http://www.cnn.com

<공포의 총합> 정보 페이지 http://upcomingmovies.com/sumofallfears.html

톰 클랜시 웹파일 http://users.cybercity.dk/~buu2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