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베케르에 대해서는 유포되는 어떤 이론도, 학문적인 분석도, 논문도 없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베케르의 <현금에 손대지 마라>에 대한 글의 서두를 이렇게 열었다. 사실 트뤼포가 쓴 그 문장에는 원래 어떤 개탄의 정조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은 베케르에 대한 시네필적인 정당한 자책의 사례로 인용될 만한 것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케르라는 시네아스트는 트뤼포를 위시한 누벨바그 멤버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은 (장 르누아르, 장 콕토, 로베르 브레송 등을 포함해) 몇 안 되는 앞선 세대의 프랑스 감독들 중 하나였으나 지금까지 충분한 관심과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러티브 구조의 복잡함과 스타일의 과시보다는 인물문제에 좀더 비중을 둔 베케르 영화는, 누벨바그 세대가 비난했던 동시대 다른 프랑스 영화감독들의 영화와 외견상으로 큰 구별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트뤼포나 고다르에게 베케르의 그 모든 영화는 다른 ‘양질 전통의 영화’와 뒤섞일 수 없는 베케르식 영화였다. 공교롭게도 베케르(1906∼60) 탄생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마련되는 ‘자크 베케르 특별전’은 그만의 미묘한 영화적 독자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
베케르의 영화세계를 이야기하자면 무엇보다 그만의 영화적 템포에서 시작하는 게 마땅한 순서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영화를 처음 보는 이들은 본격적인 전개로를 찾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소비된다는 데에 어떤 의미로든 놀랄 것이다. 예컨대 <앙트완과 앙트와넷>이 잃어버린 복권이 중요한 소재인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관객은 상영시간의 1/3 정도를 보내야만 한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가 범죄영화에 어울릴 법한 길로 접어들기까지에도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 트뤼포가 말했듯이, 베케르는 “단지 15분만 필요한 주제에 대해 두 시간짜리 영화를 찍는” 영화감독이었다. 베케르가 그처럼 드라마를 위해 꼭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스크린 위에서 소요했던 것은 일상적인 리얼리티를 지켜본다는 태도가 그에게 무척 중요했기 때문이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처럼 갱스터가 파자마를 입고 양치질하는 것을 관찰하는 데 시간을 쓰는 범죄영화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처럼 다른 영화에서라면 슬쩍 눈길을 주거나 생략해버릴 순간들이 베케르 영화에서는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받는다. 베케르가 비교적 오랜 관찰의 시간을 가진 것은 그것이 인물의 개성을 드러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인물을 환경 속에 적절히 위치시키기에 이른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러한 ‘친밀한 리얼리즘’의 세계 속에서 베케르는 자신이 목표로 했던 것, 바로 스크린 밖의 공간에서도, 장면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살아 있다고 느껴질 만한 인물의 창조에 가까이 다가갔다.
베케르는 자신을 종종 곤충학자에 비유하곤 했다. 그만큼 자신의 시선이 정밀하기를 원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정확한 관찰자이긴 하되 그 단어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혹은 냉정함과는 거리를 둔 관찰자였다는 사실이다. 베케르 영화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당연히 동감과 애정과 협력만이 아니라 배반과 적대도 포함하는 관계를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우둔하게 강직한 선택을 하거나 미련한 잘못을 저지르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 완벽하지 않은 인물에 대해 베케르는, <구멍>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베케르는 그의 아버지이자 친구 같았던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와 다르지 않은 전통 속에 놓여 있는 영화감독임이 드러난다(르누아르의 풍요로운 1930년대에 베케르는 그의 조감독으로 오래 활동했었다). 르누아르는 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로지 인간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 르누아르가 베케르를 두고 내린 평가가 “어떤 일반화한 방식이나 이론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개인이란 측면에서 인류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베케르는 이제는 쉽사리 ‘낡은’ (철학적·미학적) 가치들이라 폄훼되곤 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영화감독이었고 그런 면에서 프랑스영화의 고전적 시기의 종언에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보태준 시네아스트였다.
상영작 소개
<앙투안과 앙투아네트> Antoine et Antoinette, 1947년, 흑백, 78분 베케르는 자신이 르누아르와 비슷하며 더 나아가서는 졸라와 모파상과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 관심사를 가진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의 평단에서는 그의 어떤 영화는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에 대한 프랑스의 응답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앙투안과 앙투아네트>는 베케르의 그와 같은 측면을 보여주는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영화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애정만은 두터운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부부는 무려 80만 프랑의 당첨금을 쥐어줄 복권을 갖게 되지만 그만 그것을 잃어버리고 만다. 사회적 로맨틱 코미디라 불릴만한 영화는, 앙투안과 앙투아네트 부부가 겪는 희망과 불안, 시련을, 따뜻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터치로 그려낸다. <7월의 랑데부>(1949), <에두아르와 카롤린>(1951)과 함께 ‘사랑하는 커플’에 대한 3부작을 이룬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황금 투구> Casque d'or, 1952년, 흑백, 98분 앙드레 바쟁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에 대한 글에서 영국인인 린제이 앤더슨이 <황금 투구>를 높이 평가한 차후에야 그 영화에 대해 미처 생각지 못한 점을 재검토했다는 점이 부끄럽다고 쓴 적이 있다. 영화의 여주인공 시몬느 시뇨레가 표현한 대로, <황금 투구>는 프랑스 개봉 당시 무참히 ‘살해되었다’고 할 만큼 무시당한 영화였다. 그러나 나중에 재평가를 받으면서 이제는 베케르의 정수가 담긴 영화로 대접받는다. 영화는 벨 에포트 시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열정과 우정, 배신의 이야기를 우아하게 펼쳐놓는다. <황금 투구>에 대한 글은 시몬느 시뇨레에 대한 언급 없이는 쓰여질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그녀의 존재는 영화를 밝혀준다고 할 정도로 눈부시긴 하지만, 다른 요소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황금 투구>는 관능적인 느낌을 풍기는 시각적 아름다움과 인간 관계의 복잡성에 대한 예리한 시각, 출연한 모든 배우들의 호연 등의 어울림이 탁월한 영화인 것이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 Touchez pas au grisbi, 1954년, 흑백, 94분 젊었을 적부터 미국 범죄영화의 팬이었고 그래서 장편 데뷔작 역시 범죄영화를 만들었던 베케르는 프랑스 범죄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된 <현금에 손대지 마라>를 미국인들은 결코 만들 수 없는 유의 범죄영화로 만들어냈다. 영화는 일반적인 강탈영화와는 달리 강도 행위 이후에 일어난 일을 다루며 그 안에서 사건의 펼쳐짐보다는 인물의 묘사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말했듯이, <현금에 손대지 마라>는 “늙어간다는 것”과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노화는 주인공 막스로 하여금 ‘지하세계’로부터의 ‘은퇴’를 촉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그것을 곤란하게 만드는, 친구의 어리석은 행동에 자책하면서도 자신의 도덕률을 내던지지도 못한다. 그렇게 딜레마에 빠진 인물의 초상이 장 가뱅의 얼굴 위에 절묘하게 그려진다. 막스의 독백 장면이라든가 혹은 전화를 걸기 위해 안경을 쓰는 마지막 장면 순간들이 감동을 빚어내는 극도로 섬세한 범죄영화.
<구멍> Le Trou, 1960년, 흑백, 131분 베케르의 마지막 영화가 된 <구멍>은 흔히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1956)의 코다(coda)에 해당하는 영화로 일컬어지곤 한다. 파리의 악명 높은 쌍테 감옥에서 벌어지는 다섯 수감자들의 탈옥 ‘과정’에 카메라를 가져간 이 영화는 철저히 유물론에만 기반한 듯한 영화적 세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브레송의 영화와 구별된다. 영화는 탈옥 과정이란 육체적 행위를 때로 근접해서 그리고 시간의 생략 없이 관찰함으로써 관객에게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심리적 참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경의마저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소리의 영화인 <구멍>은 소리라는 요소를 가지고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영화적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실화를 스크린 위에 그려낸 영화로, 롤랑 역을 맡은 장 케로디는 실제 사건 속의 인물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