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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메가박스일본영화제 [1]
정재혁 2006-11-15

5일간 펼쳐지는 꿈과 사랑의 세계. 11월15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제3회 메가박스일본영화제(주체 일본영상산업진흥기구(VIPO)·공동주최 메가박스, 일본문화청)가 열린다.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일본영화를 국내에 소개해왔던 메가박스일본영화제는 3회를 맞아 꿈과 사랑을 테마로 선정했다. ‘사랑과 청춘’이란 주제 아래, 한-일간 문화교류가 단절됐던 시기의 영화를 소개했던 1회, 시리즈물을 비롯한 일본의 다양한 장르영화를 상영했던 2회 등, 지난 영화제가 주로 과거 일본영화에 초점을 맞춰 이뤄졌던 것에 비하면, 이번 영화제는 무엇보다 동시대 일본영화를 소개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개·폐막작으로 선정된 <편지>와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는 모두 올해 10월과 11월에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들이며, 이 밖에도 상영작 18편이 모두 2000년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상영작 수는 지난해 45편에서 18편으로 크게 줄었지만, 일본영화의 최근 경향을 모색해볼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한국과 일본의 영화적 시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영화제 마지막 날인 19일에는 이누도 잇신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영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갖는다.

<미친 과실> <동경> <학생 남몰래 울다> 등, 사실 1, 2회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영화들은 일반 관객에게 생소한 작품들이었다. 이누도 잇신, 이와이 순지, 미이케 다카시 등 국내에서 인지도있는 일부 감독들의 작품과 달리, 지난 영화제 상영작들은 마치 미지의 일본영화 같았다. 피가 튀기는 B급 공포영화도, 섬세한 감성이 흐르는 순정만화류의 이야기도 아닌, ‘다른 어떤 영화’. 특정 부류의 일본영화만이 마니아적 인기를 얻고 있는 국내에서 일본의 대중영화는 낯선 존재였다. 하지만 2004년의 1회 영화제는 입장료가 1천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도 78%에 가까운 객석 점유율을 기록했고, 2005년의 2회 영화제도 70%에 가까운 점유율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영화제의 한 관계자는 이를 “일본영화에 대한 숨어 있던 수요를 발견한 계기”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이는 이제 일본영화가 국내에서 하나의 하위 장르로 정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영화만의 감수성과 이를 찾는 관객. 이번 일본영화제는 동시대의 한국 관객과 일본영화를 이어줄 일종의 가교다.

영화제의 상영작들은 꿈과 사랑을 주제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다. 일본의 요괴가 총출동하는 미이케 다카시의 2005년작 <요괴대전쟁>부터 청춘의 방황과 꿈이 섬세하게 담긴 <오프 밸런스>, 부자간의 갈등과 화해를 수려한 풍경 속에 담아낸 <마을 사진첩>까지, SF물과 인디영화, 휴먼드라마와 청춘영화까지 일본영화만의 감수성과 대중성이 고루 묻어나는 작품들이다. 도쿄에서 시사를 가졌던 영화 12편을 포함, 영화제 전체 상영작 중 16편을 네 가지 테마로 나누어 소개한다. 꿈과 사랑의 세계를 체험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거리에서 만난 아픔, 눈물 그리고 사랑

이번 상영작 중에는 유독 과거와 조우하는 영화들이 많다. 사랑의 과거, 아픔의 과거, 지우고 싶은 과거 등. 더불어 이를 사방이 눈으로 덮인 홋카이도, 사라져가는 작은 마을, 크리스마스 시즌의 뉴욕 등 새로운 공간에서 풀어나가는 이야기도 이채롭다. 과거의 아련한 정서가 추운 계절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영화들을 모았다.

마을 사진첩 村の寫眞集 미하라 미쓰히로 | 후지 다쓰야, 가이토 겐, 미야지 마오 | 2005년 | 113분

도쿄로 떠난 아들은 과거를 잊는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시골의 풍경을, 자신의 고향을 기억의 뒤편으로 보내버린다. <불태워라 핑퐁> <에리에게 빠지다> 등 주로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던 미하라 미쓰히로 감독은 <마을 사진첩>에서 어긋나버린 부자관계를 돌아본다. 도쿠시마현의 작은 마을은 새로 건설되는 댐 때문에 없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모든 주민들을 사진으로 남기자고 하고, 이 일을 마을 사진관의 겐이치에게 부탁한다. 겐이치는 도쿄에 간 아들 다카시를 조수로 부른다. 다카시는 아버지의 작은 사진관을 물려받지 않겠다며 고향을 떠나 도쿄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를 ‘전자카메라’라고 부르는 아버지와 ‘마을 사진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아들의 불편한 협업이 이뤄진다. 아버지를 지우고 싶어하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 <마을 사진첩>이 제시하는 이야기 구조는 매우 진부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자가 서로를 조금씩 인정하며 화해를 이루는 결말도 그렇다. 하지만 미하라 감독은 아버지와 아들, 두 인물을 도쿠시마현의 산과 물 속에서 잡아낸다. 사라져가는 풍경과 사진으로 남겨지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가족. 영화는 한 가족의 서사를 통해 마을의 역사를, 씁쓸하지만 아름다운 시선으로 담아낸다.

눈에게 바라는 것 雪に願うこと 네기시 기치타로 | 이세야 유스케, 사토 고이치, 고이즈미 교코 | 2006년 | 112분

홋카이도 오비히로의 반에이경마장, 커다란 썰매를 짊어진 말들의 경주가 박진감 넘치는 경마와는 다르다. 모래로 뒤덮인 언덕을 넘는 말들의 모습은 오히려 힘겨워 보인다. 이들은 1년에 상금 100만엔을 채우지 못하면 곧장 말회가 된다. 쓸모에 의해 이용되고, 버려지는 존재들. 인간의 신세라고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가족과 고향을 버리고 떠났지만, 회사가 부도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마나부는 빚쟁이들을 피해 형의 도움을 빌려보려 한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말들을 꾸려온 형이 연락 한번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동생을 쉽게 받아줄 리 없다. 쇼 나루미의 소설 <반다>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흔들림없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홋카이도에서 주인공들은 눈덩이를 지붕에 올리고 합장을 한 채 소원을 비는데, 이는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다. ‘전혀 흔들림없이 살아, 멋있어 보인다’는 친구의 말에 마나부가 느끼던 혼란스런 감정은 하얀 눈 위로 고스란히 내뱉어진다. 도시에서 상처입은 인물이 시골에 돌아와 치유된다는 설정의 드라마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지만, 네기시 기치타로 감독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인간의 삶 속에서 현실과 인간의 조건을 대비시킨다. 2005년 도쿄국제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최우수 작품상 및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네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편지 手紙 쇼노 지로 | 야마다 다카유키, 사와지리 에리카, 다마야마 데쓰지 | 2006년 | 121분

이번 영화제 개막작. 게이고 히가시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형 다케시는 동생의 학비를 구하기 위해 절도를 범하고, 의도치 않게 살인까지 저지른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다케시가 감옥에 들어가자, 세상의 무게는 모두 동생 나오키의 몫. 형이 살인자라는 소문은 나오키에게 꿈과 미래를 앗아간다. 평소 개그맨이 되고 싶었던 나오키는 친한 친구와 함께 콤비를 이뤄 개그맨으로 성공하지만, 인터넷에 퍼진 형에 대한 소문이 그의 꿈을 다시 물거품으로 만든다. 죄와 벌에 대한 가슴 아픈 가족 이야기, <편지>는 살인과 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열어둔 채,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편지로 오가는 형제의 이야기는 누가 진짜 피해자고 누가 진짜 가해자인지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하지만 나오키가 형이 있는 감옥을 찾아가 콤비 친구와 함께 코미디 공연을 하는 마지막 장면을 비롯, 몇몇 설정들은 감동을 너무 의식한 탓에 인위적인 느낌을 준다. 죽어가는 부인을 위해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한국영화 <선물>의 마지막 장면과도 흡사하다. 사와지리 에리카가 연기한 캐릭터도 두 형제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한 채, 그냥 소비되고 만다는 느낌이다. <뷰티풀 라이프> <윤무곡-론도> 등 TV드라마를 주로 연출했던 쇼노 지로 감독이 <어디든 어디> 이후 16년만에 메가폰을 잡았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ただ、君を愛してる 신조 다케히코 | 다마키 히로시, 미야자키 아오이, 고이데 게이스케, 구로키 메이사 | 2006년 | 116분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유명한 작가 이치카와 다쿠지의 또 다른 소설 <연애사진 또 하나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대학교 입학식 날, 마코토는 거리에서 우연히 시즈루를 만난다. 어려 보이는 외모가 전혀 대학생 같지 않은 시즈루. 사진을 매우 좋아하는 마코토는 조금은 별나 보이는 시즈루를 카메라에 담고, 시즈루는 그 순간 마코토에게 애정을 느낀다. 이후 영화는 함께 수업을 듣고, 사진을 찍으러다니는 두 남녀의 달콤한 에피소드를 담는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숲은 둘만의 비밀 장소. 하지만 어느 날 시즈루는 바로 그 장소에서 마코토가 다른 여자인 미유키와 함께 있는 걸 목격한다. 마코토는 미유키를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즈루는 마코토가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하며, 성숙한 여자가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뉴욕으로 떠난다. 그리고 6년 뒤, 갑자기 날아온 편지 한통을 갖고 마코토가 시즈루를 찾아 뉴욕으로 향한다. 신조 다케히코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연출작인 이 영화는 사실 <연애사진…>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감성과 더 가깝다. “이치카와의 퓨어한 세계관을 공들여 표현하고 싶다. <지금…>의 감성이 느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감독의 멘트처럼 영화는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부서지지 않는 남녀의 감정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현재 이준기와 함께 <첫눈>을 찍고 있는 일본 여배우 미야자키 아오이의 귀여운 매력이 십분 살아 있는 작품. 이번 영화제 폐막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