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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갇힘의 환상
2006-11-17

<괴물>을 비롯한 한국영화에서 나타나는 고립과 감금의 모호함

최근 프랑스에서 개봉한 <괴물>에는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이 있다. 괴물이 섬 위로 갑자기 튀어나오는데, 겁에 질린 군중 가운데 몇몇이 컨테이너에 몸을 숨긴다. 괴수는 쉽게 문을 부수고, 뜨거운 피가 마치 과일 압착기로 짜낸 주스처럼 컨테이너 아래로 흘러내린다. <괴물>은 엄청난 영화로, 오래전부터 한국영화가 우리에게 선보인 것 중에서 가장 풍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복합적인 주제 가운데 갇힘의 환상은 많은 다른 한국영화가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무르익은 과일 짓이기듯 하는 괴물의 야만성 이상으로 봉준호 감독은 인간의 비탄을 작품에서 잘 잡아냈다. 한번 닫힌 컨테이너, 문을 두드리는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어느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스스로 갇힌 한 무리의 사람들은 안전한 피신처를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막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감독은 계속해서 닫힌 공간을 연출했다. 괴물은 서울 내장부에 둥지를 틀고 있다. 생포된 현서는 그 속에서 괴물의 시야를 벗어난 틈새 은신처를 찾아냈다. 그렇지만 그곳의 갇힘 역시 (목마름과 배고픔 등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탈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만 결국 죽게 된다. 다른 장면들도 갇힘을 다루면서 마치 정보화 사회로부터 도주하는 것과 같다.

<괴물>의 무대장치는 십여개의 상자들로 구성되어, 그곳에 처박힌 인물들은 작은 문을 통해 달아난다(다리의 구조물, 작은 구멍가게, 송강호가 잡혀 있던 컨테이너 등). 이런 닫힌 공간 너머로 자신이 삼켰던 사람들을 다시 토해내는 괴물은, 또한 숨막힐 듯하고 끈적거리는 일종의 은밀한 공간인 흉측스러운 배가 되어 어린 소년을 뱉어내기에 이른다. 괴물이 죽은 뒤, 영화는 눈 내리는 가운데 안락한 가건물의 마지막 밀폐된 공간에서 끝을 맺는다. 무척이나 따뜻한 그 속에는, 눈보라를 피해 있는 새로운 친구 두 사람이 있다. 그러나 송강호의 시선은, 모든 피신처는 또한 함정이기도 하다는 영화의 교훈을 암시한다.

여러 측면에서 봤을 때 한국인들은 여관, 노래방, 2층 이상에 자리한 카페(프랑스의 카페는 전통적으로 거리에 맞닿은 1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등과 같이 고립된 장소의 포근한 안락감을 좋아하는 듯하고, 논리적으로 많은 작품들은 고립과 갇힌 답답함 사이의 감금의 모호함에 천착한다. 그렇게 수족관은 새로운 한국영화의 모든 배경으로 나타난다. <쉬리>의 물고기에서, 이재용 감독이 마치 어항처럼 꾸민 창유리를 통해 찍은 <정사>의 가정주부까지.

한편 감금에 있어서 뛰어난 또 다른 감독은 김기덕이다. 근본적으로 ‘주변부’에 위치했음에도 그가 봉 감독과 함께 공통의 집착을 키워나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김기덕 감독의 인물은 스트립쇼를 하는 밀실과 물 위에 떠 있는 절, 호수 위 작은 집들과 잔잔한 바다 가운데 배에 이르기까지 고립되어 틀어박혀 있다. 우리는 소녀가 경찰을 피하기 위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사마리아>의 한 장면에서 작은 탈출구를 다시 발견한다. 이 과정은 ‘빈집’을 찾는 가운데 절정에 이르러, 주인공의 침묵에 싸인 몸이 전형적인 의미에서 고립의 공간이 될 때, 화면엔 ‘모두를 위한 낙원’이란 글이 나온다. <악어>에서 걸인 자신이 만든 수중의 작은 거실에서 스스로 익사하는 것으로 끝맺을 수밖에 없었을 때 모든 것은 보여졌다. 심지어 <괴물>과 같은 무대에서도 한강변에 자리잡은 숨막힐 듯한 은신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