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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본드 이전의 본드로 돌아갔다

<007 카지노 로얄> 배우 인터뷰

논란은 아직까지 잦아들지 않고 있다.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논란의 중심이 ‘제임스 본드의 캐스팅이 적절한가’이지 결코 ‘아직까지도 007 이야기가 유효한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본드의 존재는, 적어도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유효기간을 초월한 이념형이기에 캐스팅 문제는 ‘본드 나고 배우 났지, 배우 나고 본드 났나’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거칠고 투박한 대니얼 크레이그가 낙점을 받은 까닭은 21번째 007 시리즈 이야기가 제임스 본드라는 ‘요원의 탄생’ 기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동안의 본드 이미지는 본드 이전의 본드로 소급되어야 했고, 탄생 과정을 통해 본드 이전의 본드는 이제까지의 본드 이미지를 정당화하도록 소환된 셈이다. 연대기의 역주행 때문이었을까, 인터뷰가 이루어졌던 7월 말부터 개봉을 앞둔 지금까지 현재 완료형의 제임스 본드와 현재진행형 대니얼 크레이그는 빠른 속도로 교차하며 기시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달려왔다. 이전까지의 007 시리즈 스무편이 특제 007 가방 속에 담겨 DVD 세트로 인터뷰 일주일 전에 발매됐고, 인터뷰 열흘 뒤에는 촬영 스튜디오에서 화재가 발생했으며, 인터뷰에 앞서 이루어진 하이라이트 상영은 엠바고 준수 서명을 통해 기밀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몇몇 참석자의 손엔 갓 발간된 영화잡지 <엠파이어>의 007 신작 독점 기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영국 언론은 007 전통이 영국의 디자인 스타일- 첨단 테크놀로지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에 끼친 문화적 기여도를 성찰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신참 요원 크레이그가 오메가 시계와 소니 노트북 광고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 아이콘으로 거듭나고 있다.

애바 그린과 대니엘 크레이그(왼쪽부터)

국제테러조직 자금책 르쉬프트 역의 미켈슨(오른쪽)

캐스팅에 대해 팬들 사이에 논란이 후끈하다. 안티 사이트까지 생겨날 정도다. 대니얼 크레이그: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봤지만 휩쓸리고 싶지 않아 댓글 같은 건 달지 않았다.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건 영화를 보고 판단해달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 얘기해도 된다. 내가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정작 보고 나서 판단할 문제 아닌가? 팬들의 반응 때문에 오히려 더 잘 만들고 싶었다. 에바 그린: 대니얼은 매사에 성실했고 진지했다. 위험한 장면도 많았는데 몸을 사리지 않더라. 카트리나 무리노: 그는 이미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배우이다. 기존의 007 시리즈와는 다른 이야기, 즉 본드라는 요원이 탄생하는 과정을 담는 작품이라 이제까지와는 다른 색깔이 필요한데, 대니얼은 거기에 제격이다.

007 시리즈는 본드뿐만 아니라 본드걸과 악당들도 강한 스테레오 타입을 가지고 있다. 대니얼 크레이그: 이 영화에서는 기존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진실을 찾아나가야 했다. 그래서 더욱 거칠면서도 순정적인 인물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후의 본드가 한 여자만 사랑하지 못하는 사연도 담겨 있다. 에바 그린: 본드걸 하면 비키니를 걸친 섹시함으로 대변되었지만, 내가 맡은 역은 훨씬 감성적인 인물이었다. 육감적인 본드걸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사무직 여성 이미지가 더욱 강하다. 본드가 단순한 살인 기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었다는 것을 제시해야 하는 상대역이기 때문이다. 카트리나 무리노: 나 역시 전형적인 본드걸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내 역할의 경우 악당과 결혼한 여인인데,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본드를 도우려 한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녀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행동을 했기에 본드걸의 전형에서 벗어난다고 본다. 마스 미켈슨: 내가 연기한 악당은 내셔널리티와 관련된 정치적 음모와는 거리가 멀다. 비자금을 세탁하고 테러단체의 자금을 모집해 넘기는 지극히 냉소적인 인간이다. 본드와의 대결도 액션보다는 심리적 긴장감 속에서 일어난다.

당신들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007을 접하면서 성장해왔다. 개인적으로 007은 어떤 영화인가. 대니얼 크레이그: 여느 영국인들처럼 나도 007 영화 팬이고 늘 본드의 자동차와 정장에 끌렸다. 로저 무어의 출연작들을 통해 시리즈에 입문하긴 했어도, 본드라는 인물을 규정하고 창조해낸 숀 코너리를 최고로 꼽는다. 에바 그린: 벽에다 제임스 본드 포스터를 붙여놓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프랑스TV에서 접했던 본드는 늘 섹시했다. 나도 숀 코너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카트리나 무리노: 이제까지의 최고는 숀 코너리였지만 아마 이번 영화로 바뀌지 않을까 기대한다. 훗날 아이들에게 ‘엄마가 왕년에 본드걸도 했었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추억이 될 테다. 마스 미켈슨: 시리즈 전편을 섭렵하진 못했지만, 강철 이빨로 나왔던 악당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덴마크라는 변방에서 작은 영화만 찍다가 이렇게 본드 패밀리에 어울리게 되어 기쁘다.

촬영장 분위기는 어땠나. 대니얼 크레이그: 상대역이었던 에바 그린은 복잡 미묘한 배역을 아름다우면서 훌륭하게 해냈다. 애송이 본드를 이끌어주는 상관 M 역의 주디 덴치는 말 그대로 대모였다. 하마터면 눈속에 빨려들어갈 뻔했다. 007 영화에 여러 번 출연했던 대선배이기에 현장에서도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었다. 에바 그린: 애석하게도 난 주디 덴치와는 촬영 스케줄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다. 대신 다른 배우들이 촬영장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어갔다. 마틴 캠벨 감독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언제든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생각을 수정하기도 했다. 카트리나 무리노: 아니, 캠벨 감독은 절대 자유로이 풀어주지 않았다. 카리스마로 촬영장을 압도했다. 에바 그린과 내 역할이 서로 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액션장면 하나하나 치밀하게 가져가는 타입이다. 마스 미켈슨: 내가 포커를 할 줄 몰라 애를 먹긴 했다. 별도의 과외선생까지 붙어서 연습했으니까. 이전까지 덴마크에서 스무명 남짓한 스탭과 영화를 찍어오다가 이번처럼 대규모 작품에서 연기해보니 무척 즐거운 일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