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배우학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선생들도 재능이 있고 했지만 학생들은 자기를 포기하는 정도였죠. 그래 내 생각에 하루라도 빨리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박승필(단성사 사장. 한국인 최초의 극장 경영인- 필자)씨가 나한테 제안을 했어요. 배우학교와 단성사가 합작을 하자는 겝니다. ‘배우학교측에서 배우, 의상, 소도구, 각본, 감독을 맡고 기술에 대한 책임, 자제, 진행비는 단성사에서 맡겠다’ 하는데, 이게 절호의 찬스란 말이에요.
명실공히 배우학교로서의 바탕이 있으니 어서 제작하잔 말이야. 그런데 이제 승필씨 생각은 좀 달라요. 아직 이르단 말이야. 한 이삼년 가르쳐가지고 만들자는 거지. 그래 내가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실수를 하면서 배울 수 있는 거란 말이오. 먼저 실천 의욕을 주어야지. 지금 이 사람들의 정열을 본다면 주연하고도 남아. 그러니 시킵시다’ 했지. 그래 그런 식으로 나하고 왈가왈부하다가 승필씨가 결국 ‘그럼 하자’ 했죠.
공중을 나는 장면 찍고 싶었지만…
이게 25년도입니다. 그래 박승필씨는 <심청전>을 하자고 그래요. 나도 <심청전>을 하자고 했죠. 그런데 윤백남 프로덕션에서도 <심청전>을 한다는 겝니다. 이경손 감독에다 김조성이가 변사를 보고 나운규가 나오고…. 안 되겠다 싶어서 박승필씨에게 이야기해서 판권 등록을 했습니다. 이게 최초죠.
그래 이렇게 옥신각신 하는데 단성사에서 꼭 그것만 해야 되겠느냐 말이지, 아무거나 빨리 하자는 겝니다. 그래서 현철씨가 <숙영낭자전>을 제안하게 됐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차라리 <전우치전> 같은 거, 공중을 떠서 날아다니게 하고 좀 예술적으로 특별한 것이 좋겠다 싶었는데 기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숙영낭자전>으로 떨어졌죠. 단성사하고 이익배분 얘기에 들어갔는데, 단성사에서는 3:7로 3부를 배우학교로 하자고 그랬죠. 현철씨가 천길만길을 뛰는 겝니다. “딱 까놓고 단성사에서는 돈만 냈다 뿐이지 우리가 전부 다 한 게 아니냐?” 이런 말이야. 여기에서 충돌이 났습니다.
“여보, 이거 합시다. 3:7이라도 해놓으면 2회전, 3회전 커지면서 학교도 살고, 한국영화도 건설될 게 아니오. 이런 좋은 찬스를 놓칠 거요?” 나는 그랬습니다. 결국 단성사에서는, 현철이란 사람 알고보니까 이거 안 되겠다는 말이야. 구영이만 나와 놓으란 말이야. 그래 하니까 현철씨가 나하고는 완전히 의를 상하고 둘은 쪼개져버렸지. 쫙 그냥! 그러니까 배우학교도 그치게 된 거지.
결국에는 <숙영낭자전>도 무산이 됐습니다. 자존심에 그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제 훈정동에 촬영소를 만들었어요. ‘고려영화제작소’요. 필우(이필우, 지난호에 다룬 바 있다- 필자)하고 이걸 만들고 이제 시나리오는 내가 주로 집필을 하는데, 거기서 만든 것이 <쌍옥루>입니다. 그해가 을축년(1925년)입니다. 필우하고 나하고 자꾸 의견 충돌이 돼서 시나리오 쓰는 데 거진 한달을 잡아먹었습니다. 필우는 카메라맨으로서 주장을 하지만 나는 작가로서 주장하는 것이었으므로 결국은 내 주장대로 시나리오가 됐고, 그때 그 시나리오 가지고 그냥 연출도 했습니다. 여기에 상당히 긴 얘기가 많습니다. 특히 주인공 맡은 김택윤이하고 대결한 게 많습니다. 하나 말씀드리자면, 애초에 김택윤이하고 한달에 개런티 50원을 정했습니다.
최초로 개런티를 매긴 거죠. 그런데 장마가 있어 영화촬영이 한달을 넘게 됐어요. 그러니까 김택윤이가 개런티 100원 더 내라는 겁니다. 우리가 고의로 안 찍은 것도 아니고 불가항력으로 이래 됐으니 타협을 하자고 했죠. 그런데 결렬됐어요. 그러자 김택윤이가 필름을 가져가버렸어요. 거진 촬영이 끝나갈 무렵인데, 보니까 없어진 게 김택윤이가 나오는 장면들이더라고. 결국은 싸우고 찾아냈죠, 필름을. 참, 인간적으로 뭐라 할 것도 없고…. 우리는 그냥 그러고 말았는데, 그 반동으로 김택윤이가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너만 만드냐’ 하는 식의 오기였죠. 그게 <흑과 백>(1927년)이라는 영화입니다. 나중에 우미관에 올렸죠.
카메라 하나가 촬영소 하나
그리고 그해 말에 내가 단성사에 입사를 했습니다. 단성사의 선전국장이 되면서 눌러앉은 것이 되겠죠. 그때 한국사람이 하는 극장이 몇 군데밖에는 없고, 전부 일본사람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영화의 애로라는 것이, 뭐 터가 있어야 영화가 사는 것이죠. 만드는 것, 이게 장한 게 아니고 어떻게 육성하느냐 그건데, 육성할 수도 없었고….
단성사 있을 때 내가 문단에 계신 분들하고 대개 다 가까웠어요. 그러다 춘원 이광수 선생도 알게 된 건데 한번은 이 양반이 조선영화계를 살리자면서, 좋은 카메라가 왔는데 이것을 놓치지 말고 꼭 사라는 말이야. 그래 내가 구경을 좀 해도 되겠냐고, 카메라를 봤습니다. 보니까, 현대영화의 카메라다운 모습이 나오고 좋아요. 1901년제로 샌프란시스코 제작인데 공장 이름은 ‘윌리아드’죠. 구라파에서 뉴스촬영을 하고 오다가 여기까지 떨어진 거라고 하더군요. 이것을 사야 되겠는데, 얼마나 하면 되겠냐고 물었더니 천백원인데 더이상 깎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길로 내가 단성사로 급히 갔습니다.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란 말이야. 그래서 그 카메라를 사게 됐죠. <낙화유수>(1927년작- 필자)가 그 카메라로 된 겁니다.
그거 사진을 보세요. 아닌게아니라, 화면이 상당히 밝았죠? 렌즈가 좋고 하니까…. 그런데 여기에 한국 최초의 주제가가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영화주제가라는 것이 그게 최초입니다(이 영화 이후로 <풍운아> <춘희> <승방비곡> 등에서도 주제가가 만들어졌다- 필자). 이정숙이라고 내 누이가 있는데 우리나라 동요는 얘가 혼자 다 불렀어요. 얘가 그때 극장 꼭대기에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차지(charge)가 그때 돈으로 10원입니다. 작곡은 김영환이가 했고 가사는 아주 저속합니다(‘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어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세울까’ 주제가 <강남달>의 가사- 필자)
어쨌든 그 카메라 때문에 한국영화가 훨씬 쉬워졌죠. 우리는 그때 카메라 한대 있으면 막 이야기해서 촬영소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화가 하나 생기는 거예요. 카메라 한대면 재산이라 말이죠. 그걸로 내가 <승방비곡>도 찍었습니다. 29년에 동양영화주식회사에서 찍었는데 그거는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 돈으로 8천원 들었습니다. 사장 양정환이 남의 자본을 끌어온 거죠. 그런데 그게 이자가 많이 붙어 파산지경이 됐습니다. 게다가 소요산 로케이션을 잡았는데, 비가 2주일 연달아 오는 바람에 영화가 제대로 못 나왔죠. 그 바람에 회사가 문을 닫게 됐습니다. 영화배급도 끊어지고, 또 우리는 월급도 한푼 못 받았었어요. 월급은 다른 사람이 갚아주기로 했죠. 지금은 납북되어 갔지만, 그때 <매일신보> 사회부장이던 정인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영화사를 인수했습니다. 이게 30년 됐을 땐데, 그 사람에게 월급을 찾았죠. 그래 우여곡절 끝에 촬영하고 완성해서 그해 3월인가 4월에 단성사에서 개봉을 했죠.
<금붕어> 관객에게 금붕어 선물
이제 내 영화 얘기는 그만하고 단성사 있을 때 일들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초기의 선전이라는 것은 광고지를 뿌리는 것으로서 16절지를 3천장 박았습니다. 특별상영 때라고 하면 8절 3천장이고. 닷새에 한번씩은 영화가 갈렸으니 포스터라고 하는 것은 거의 없었고, 만들 필요도 없었죠. 으레 선전하는 게 ‘마찌마와리’라고 해서 악대를 선두로 해서 기(旗)를 들고 브라스 밴드에 맞추어서 서울 시내를 한번씩 도는 게 있는데, 네 시간 동안 서울을 돌아요. 이때 기라고 하는 것은 그 극장의 기가 두개, 앞장을 섭니다. 그리고 이제 걸리는 영화, 그것이 네댓장 정도 됐죠. 그렇게 했고. 또 20행에서 25행 정도의 광고를 매일매일 신문에 내줍니다.
한달에 광고료가 5원. 참 쌌죠. 또 다음에 중요한 것은 간판입니다. 간판이 대개 다섯장 내지 여섯장입니다. 극장 전면에 걸리는데, 한개에 2원 50전입니다. 그리고 이제 프로그램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프로그램에는 최초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영화 제명, 해설을 누가 한다, 이것뿐이었지. 그나마 64절로 1500장 박았습니다. 광고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래서 내가 단성사에 입사하고 첫 번 계획한 것이 프로그램입니다. 프로그램 이게 광고지도 아니고 그냥 영화 타이틀만 떡 적어놓고 변사, 거기 해설 누구 한다는 이거밖에는 없으니 벌써 무엇을 상영하는지 손님이 아는 이상에는 주나 마나죠. 그러니 무엇인가 손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즉 영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의미에서 좀 필요하다 해서 내가 계획한 거죠. 그래 내가 32절을 반 접어서 64절을 해서, 펴면 그게 16절이 되는 것으로 만들어서 그 위에다 이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영화 캐스트, 감독은 물론이고 간단한 스토리, 그리고 밑에 다음에는 뭘 한다고 하는 예고 정도를 적어 출발했죠.
그것이 최초의 개혁이었는데 한 1년 가다보니 암만 해도 욕구불만입니다. 그래 이제 프로그램을 확장해서 8절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조선극장과 경쟁이 붙으면서 그걸 30페이지까지 만들었어요. 거기는 외국영화와 국산영화의 움직임, 또 해설 시간도 몇분 동안 몇번 한다는 것을 통째로 집어넣고, 그리고 어떤 비판을 좀 썼어요(이구영은 한국 최초의 영화평론가라고 할 수 있다- 필자). 내가 변사의 해설이 진부하다고 몹시 한번 친 일이 있는데 그때 서울 시내 변사 한 10여명이 와가지고는 항의문을 제출하고 가기도 했습니다.
<금붕어>(1927년작)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을 적에, 극장에서는 선전물을 줄이려고 했지만 나는 무엇인가 이색적인 광고를 해서 손님을 더 끌어보겠다는 욕심이 있었죠. 그래서 신문광고에 <금붕어>를 구경오시는 분에게는 금붕어를 세 마리씩 그냥 거저 드린다는 광고를 냈었어요. 그것이 주효해가지고 히트했죠. 이게 나운규 영화였는데, 이 다음에 <아리랑> 얘기를 하도록 하죠. 이게 사건이었습니다.
정리 최예정/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netian.com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