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야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담뱃값을 잘 모르는 사람, 말씨와 눈빛이(크아!) 이상한 사람 등등은 신고하라던 안내를 외우고 자란 내 눈에 국정원이 내놓은 ‘19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북한공작원 접촉 의혹사건’은 글로벌한 지식강국의 체모를 구기기에 충분하다. 왜 국민소득이 올라가도 ‘간첩질’은 후진적이기만 한 걸까. 그것이 (북쪽 정보기관의) 공작인지, (북쪽 혹은 남쪽 일부인사의 충성경쟁을 겸한) 오버인지, (남쪽 정보기관의) 음모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터넷만 잠깐 뒤지면 나오는 걸 굳이 문건으로 작성해 보내랬다니 어이없다.
국정원에 따르면, 간첩 혐의자 장민호(44)씨는 80년대 미국에 건너가 그곳에서 포섭된 뒤 주한미군과 IT업계 등에 근무하며 홍콩사서함 등을 통해 꾸준히 ‘동향 보고’를 해왔다고 한다. 최근에는 북한 대외연락부 간부로부터 △이명박 전 서울시장 동향 △북핵사태와 6자회담 관련 민주노동당 동향 △국방장관 해임결의안 무산경위 등을 파악하라는 지령을 받았단다. 장씨의 꾐에 빠져 ‘일심회’라는 이름도 거시기한 비밀조직에서 활동했다며 구속된 인사들 중 한명은 시민단체들을 하나의 통일운동단체에 합류시켜 반미·반전 운동을 벌이겠다고 맹세하고 그 결의문을 출력해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다녔단다. 세상에 이런 멍청한 간첩들이 다 있을까. 그런 이들이 시민단체의 반미투쟁에 개입하고 환경운동가를 포섭하고 민주노동당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관련 기사를 죽도록 써왔던 우리 사무실 신아무개, 정아무개, 류아무개 등도 용의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걸? 백번 양보해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왜 북쪽의 공화국이 잘 안 되는지 알 것 같다. 저기요, 그렇게 동향이 궁금하면 그냥 <한겨레>나 <한겨레21>을 정기구독하세요.
그나저나 용산 미군기지 독극물 방류사건 관련 환경운동마저 북의 지령이었다고 소설 써대는 일부 언론은 진정 ‘기본’에 충실한 이들이다. 그런 종류의 ‘전통적 간첩질’이 바로 당신들이 이해하는 장군님의 향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