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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빅토리아 시대 스릴러, <핑거스미스>
이다혜 2006-11-08

<핑거스미스>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레즈비언 통속소설이다. 비밀과 거짓말, 음모가 곳곳에 숨어 있고 책의 1/3 지점에서 깜짝 놀랄 반전이 등장하기 때문에 추리소설로도 읽을 수 있지만, 연속극을 보는 듯한 드라마로서의 매력 또한 대단하다. 나쁜 피의 망령에 사로잡힌 등장인물들이 운명의 장난과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려가는 이야기의 힘이 책장을 절로 넘기게 한다.

고아인 수는 살인죄로 교수형당한 어머니 대신 석스비 부인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런던 뒷골목에서 아이들을 매매하는 석스비 부인은 수를 팔아치우지도 않고 험한 일을 시키지도 않으며 유달리 보호한다. 어느 날 젠틀먼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석스비 부인의 집을 찾아와 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을 귀족 상속녀 모드를 손에 넣기 위해 수를 모드의 몸종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것. 일이 성사될 경우 상당한 액수의 사례금을 수에게 주는 것은 물론이다. 수는 하녀로서의 행동가짐을 교육받고 모드가 삼촌과 함께 사는 브라이어로 향한다. 항상 장갑을 끼고 있는, 섬세하고 학식있는 모드는 삼촌의 서재 정리를 도우며 살고 있다. 수는 모드가 젠틀먼의 구애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정성껏 돌보지만 어느새 필요 이상으로 모드를 좋아하게 된다. 세라 워터스는 장갑과 모자만큼 위선과 가장이 필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기묘한 분위기를 복잡한 이야기에 섬세하게 엮어넣는다. 모드의 삼촌이 끔찍할 정도로 공들여 정리하는 책들의 정체는 사실 외설물이었고, 손님들과 한담을 나누고 낭독회를 여는 것 같던 모드는 사실 외설물을 한자 한자 낭랑하게 읽어가는 것이라는 폭로는 이 책이 안기는 아주 작은 놀라움이다. 빅토리아 시대 음란물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세라 워터스는 실재하는 그 시대 음란물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하는데, 그런 대목들도 흥미롭다. <핑거스미스>는, 너무 완벽하게 화창한 시대이기 때문에 어둠의 그림자 또한 강렬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한 시대의 분위기를 잘 포착한 윌키 콜린스의 <흰옷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현대에도 유효한 통속극적 쾌락을 맛보게 한다. 이야기가 몇번이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고 사회의 희생양이 된 여인들은 굳게 두발을 땅에 딛고 살아남는다. <핑거스미스>는 세라 워터스가 레즈비언 역사소설에 대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구상한 <벨벳 애무하기>(1998)와 <끌림>(1999)에 이어 쓴 세 번째 소설로, <벨벳 애무하기>에 이어 <BBC> 드라마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