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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할 수 없는 악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에밀리 블런트
최하나 2006-11-02

시어머니보다 미운 사람이 시누이라고 했던가. 전장을 방불케 하는 패션 잡지사 <런웨이>에 내던져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에게 직속상관인 에밀리는 바로 그런 존재다. 악마적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의 턱없는 요구를 들어주기만도 숨이 찬데, 에밀리는 매사에 사포처럼 까칠하기 그지없다. 촌티나는 옷차림에 싸늘한 비웃음을 날리는 것은 기본이고, “넌 잡일이나 하라”며 각을 세운다. 하지만 독감에 걸려 빨갛게 달아오른 코를 훌쩍대면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이제 설사 한번만 하면 목표 체중 달성”이라며 슬쩍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은 사랑스럽다. 자신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극중 인물 에밀리를 연기한 영국 여배우 에밀리 블런트는 새침하고 얄밉지만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오직 일하기 위해 살아가고, 미란다와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에밀리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인물이다. 관객이 그녀를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하기를 바랐다.”

런던에서 태어나 10대 소녀 시절부터 연기를 공부해온 에밀리 블런트는 연극 무대의 공기를 호흡하며 연기의 경험을 쌓았다. 2001년, 19살 때 <로열 패밀리>로 첫 무대에 선 그녀는 대선배 주디 덴치의 상대역을 맡는 행운을 거머쥐었고, 이브닝 스탠더드 어워드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이듬해 치체스터연극제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곧 TV로부터 무수한 러브콜을 받았고, <부디카> <헨리 8세> <로마> 등의 시대물을 비롯해 <나일강의 죽음>과 같은 스릴러까지 다양한 역할을 섭렵했다. 그리고 2년 전, 마침내 스크린 진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인디영화 <사랑이 찾아온 여름>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영국아카데미(BAFTA)를 비롯해, 무수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비평적 찬사를 얻은 이 작품에서 에밀리 블런트는 냉소적인 소녀 탐진 역을 맡았다. 여름방학을 맞아 요크셔의 별장을 찾은 그녀는 시골 소녀 모나를 성적인 유희의 상대이자 실험대상으로 이용한다. “에밀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탐진을 발견했음을 깨달았다”는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말처럼 에밀리 블런트는 탐진의 역할을 가장 매혹적인 형태로 소화해냈다. 교묘한 거짓말로 모나를 유혹하는 탐진은 영악하고 교활하지만, 니체와 프로이트를 숭상하고 에디트 피아프에 심취하는 소녀의 오만한 세계는 묘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탐진처럼 복잡한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녀는 거짓으로 가득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악역은 악역이되, 미워할 수 없는 인물.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에밀리는 탐진의 연장선상에 서 있기도 한 셈이지만, 할리우드 데뷔작이 안겨주는 무게는 전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심리적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특히 자신의 “우상과도 같던” 메릴 스트립과 한자리에 서게 된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미란다 프리슬리의 카리스마에 시종일관 압도당하는 극중 에밀리처럼 그녀도 대배우의 존재감에 숨막히는 중압감을 느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손바닥이 늘 땀으로 축축했다. 테이블 위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정도였다. (웃음)” 그녀가 선택한 해결책은 어찌 보면 상당히 소박한 것이었다. 외관을 꾸미는 것에 치중하지 말 것, 그리고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 진실할 것. “병약해 보일 정도로 살을 빼라”는 프로듀서의 말에 “그러면 응급실에서 제 전화를 받아야 할걸요”라는 당돌한 말로 응수한 그녀는 살을 빼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했다. 시나리오상에서 미국인 여성이었던 에밀리 역의 설정을 영국인으로 바꾼 것. “영국식 발음이 가진 특유의 젠체하는 듯한 악센트가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직관을 믿고,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영국인으로서의 자산을 이용해 캐릭터의 성격을 절묘히 포착한 그녀에게 메릴 스트립은 “지금까지 내가 함께 일했던 젊은 여배우 중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임에 나가면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자신이 “스페어 타이어 같았다”는 에밀리 블런트는 이제 밀려드는 출연 제의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현재 확정된 그녀의 차기작은 <윈드 칠>. 조지 클루니와 스티븐 소더버그가 제작하는 호러영화로, <폭력의 역사>로 얼굴을 알린 애시튼 홈스가 그녀의 상대역을 맡았다. “단순히 유혈이 낭자한 잔인한 영화가 아니다. <윈드 칠>은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오싹한 공포 속에서 “사랑과 인간의 욕망이 빚어내는 비극”을 이야기할 에밀리 블런트의 새로운 모습은 내년 2월 미국 극장가를 시작으로 관객을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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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R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