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붙일 곳 없는 세계 이웃들을 위한 작은 안식처
사진집단 일우 대표 김홍희의 베스트, <유민의 땅>
Choice/ <유민의 땅> 성남훈 지음/ 눈빛/ 2005년
‘잊어선 안 될 최초.’ 김홍희는 성남훈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갖는 의미를 높이 친다. “우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웃에 관심을 돌린 첫 번째 한국 사진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앞으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이 많이 나올 텐데 성남훈의 <유민의 땅>은 교본이자 전범으로 남을 것이다.” <유민의 땅>은 성남훈이 프랑스 에이전시인 라포에 소속해 있던 지난 15년 동안 보스니아, 인도네시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르완다 등의 분쟁 지역을 돌며 찍은 사진들을 모은 사진집이다. “한숨과 울부짖음으로 가창되는 지구시대의 뼈아픈 노래”라고 박노해가 말미에 말하듯, <유민의 땅>은 삶의 터전을 잃고서 칠흑 같은 운명을 감수해야 하는 유민들의 비가(悲歌)다. 자신들의 흐느낌을 한 소절만 들어달라고 청하는(인물들의 포즈를 보라!) 유민들의 청을 성남훈의 카메라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유민의 땅>은 몸 붙일 곳 없는 세계 이웃들을 위한 작은 안식처인 셈이다. 안식처의 문을 조심스레 열면, 구슬픈 아코디언에 맞춰 우는 루마니아 집시 소녀와 총구 아래서 웃음을 내보이는 보스니아 소년과 맨홀에서 사는 몽골 소녀와 탱크 포대 위에서 고개를 떨어뜨린 아프가니스탄 소년이 선(善)이 저지른 참상을 모르는 낯선 이방인을 맞는다. 김홍희는 <유민의 땅>이 나오기까지 작가의 고군분투를 전하면서 “한국사회가 언제쯤 이런 이웃들을 따뜻하게 껴안을 만큼 성숙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을 내놓았다.
Another Choice/ 최민식의 <Human 1∼12>
“내가 고향이 부산이라서 선생님을 택한 건 아니다. 아마 100년 뒤에 한국 사진사를 다시 쓴다고 할 때 여전히 짱짱하게 남아 있는 분은 최민식 선생이 아닐까. 사진의 유파와 상관없이 그는 거목이다. 안목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선생의 사진에는 질곡의 시대가 드리워져 있다. 질곡의 시대를 기록했던 용기를 볼 수 있다. 연작 사진집 중 초창기 사진들을 특히 다시 보고 싶다. 덧붙여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은 절판됐는데,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동경했던 작가다. 다들 카메라 들고 인도로 떠나지만 <인도방랑>에 비하면 모두 수박 겉핥기다. 카메라가 삶에 동화되는 걸 후지와라 신야는 직접 보여준다.”
김홍희/ 사진집단 일우 대표·<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방외지사> <암자로 가는 길> <예술가로 산다는 것> <인도기행> <세기말 초상> <방랑><나는 사진이다> 등
잠자고 있던 서울의 기억을 만나는 순간
다큐멘터리 사진가 성남훈의 베스트, <서울 1969-1990>
Choice/ <서울 1969-1990> 전민조 지음/ 눈빛/ 2006년
극장 앞에서 완장 찬 이가 관객을 줄세우던 종로가 있었다. 지게꾼과 미니스커트가 공존하던 명동이 있었다. 차력시범이 펼쳐지던 강남터미널이 있었다. 소가 쟁기 끌던 압구정이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100m 넘게 줄을 서야 했던 잠실이 있었다. 수해 때 세간살이와 목숨만 건져야 했던 중랑교가 있었다. 전민조의 <서울 1969-1990>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서울’을 오래된 거울을 꺼내 샅샅이 비춘다. “<서울…>은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에게 던져진 묵직한 화두”라며 성남훈은 “그의 사진은 볼 때마다 단순한 기록이라고 일컬을 수도, 그저 보도사진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솔솔한 휴머니즘과 일관된 미감이 배어나오는 작품들”이라고 말한다. 전민조의 사진들은 꼼꼼히 뜯어봐야 한다. 오래, 자주 봐야 많이 보인다. <서울…>을 가득 메운 군중 사진들이 특히 그렇다. 전민조의 군중은 점들의 집합이 아니다. 일례로 보행위반자들을 찍은 1975년의 동대문을 보면, 가슴 졸이며 딱지떼는 남자와 밀지말라고 손들어 제지하는 남자와 벌금을 확인하려고 애쓰는 뒷줄 남자와 담배 피우며 생계를 걱정하는 남자와 어디선가 나타난 카메라를 발견하고 포즈를 취하는 남자가 뒤섞여 있다. 특정 누군가를 클로즈업하고, 특정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민조의 사진집은 <서울…>이라는 제목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 “미문화원 점거 당시의 함운경씨를 찍은 사진이 생각난다. 그때 난 전경이었다. 386이라 그런지 전경들 앞에서 분을 터트리는 국회의사당 사진 등이 생생하다.” 성남훈의 말처럼, 전민조의 <서울…>을 뒤적이다 보면 특별한 공명의 순간이 느껴질 것이다. 그땐 잠자고 있던 서울의 기억들이 깨어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Another Choice/ 이갑철의 <충돌과 반동>
“이갑철 선생은 카메라를 오래 잡았지만 숨겨진 인물이었다. 사보 등에 기고하면서 한국의 전통에 대한 개인작업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긴 했는데, <충돌과 반동>이 나오기 전까지 그의 작업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일반적인 기록사진의 범위 안에서 그의 작업을 예상했는데, <충돌과 반동>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줬다. 무속, 불교 등의 행사를 뒤좇으면서 단순한 기록이 아닌 철저히 작가 개인의 사적 해석으로 채워넣었다. 두려움과 흥이 뒤섞인 신적 기운을 맛보면서, 한국적인 소재를 찍는다고 해서 한국적인 것이 전달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날것들의 강렬한 생동을 언제쯤 간직할 수 있을까.”
성남훈/ 다큐멘터리 사진가·개인전 <루마니아 난민> <소록도> <아프가니스탄에 피는 꽃> <유민의 땅>· 단체전 <Salon 92> <세계보도사진 대전> <동강사진축전> 등 다수
얇지만 얄팍하지 않은, 초라하지만 진실한 입문서
사진작가 구성연의 베스트,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Choice/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눈빛/ 2006년
“사진 관련 서적 중에 아담하고 친근한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손으로 들기도 버거울 정도로 무겁고, 비싸기까지 하다. 절판된 김기창 선생의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손에 담을 수 있어서다. 그리고 몇달 전에 선물받은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가 또 그러하다.” 물론 싸고, 휴대가 간편하다는 이유로 구성연이 이 책을 선택한 건 아니다. 안셀 애덤스, 도로시아 랭에게서 사진을 배운 필립 퍼키스는 프랫 인스티튜트를 비롯해 뉴욕대 등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맡아온 교육자. 출판 당시 소개글에 “초라한 책, 그러나 진실한 내용”이라고 적었다는 퍼키스는 도입부에서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고 충고한다. 대상을 서둘러 삼키려 들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라는 그의 조언은 이 책을 읽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흑백사진, 인물, 풍경, 디지털 등의 세부 주제들에 관한 강의 내용을 달달 외워봤자 소용없다. 가까이 두고 오래 볼 일이다. “얇지만 절대 얄팍하지 않은 입문서”라고 소개하는 구성연은 굳이 사진가를 꿈꾸지 않더라도 비평 부문의 강의는 새겨들을 만하다고 말한다. “작품을 대할 때 저건 무슨 의도로 찍었지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 저자는 비평이 심리치료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저 고매한 작가가 숨겨놓은 의도는 뭘까라는 호기심이 혹시 난 천박한 감상자는 아닐까라는 의구심으로 변질되면 더이상 작품과 관객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테크닉을 강조하는 입문서들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Another Choice/ 타린 사이먼의 <The Innocents>
“처음 봤을 땐 도시와 시골의 집들, 그곳에 사는 것 같은 인물들을 찍은 사진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캡션을 읽어보니 무고하게 살인범으로 몰려 감옥에 간 이들을 찍었더라. 모두 억울한 과거 때문에 삶이 일그러진 인물들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사진은 옥고 끝에 범행이 일어났던 장소를 다시 찾는 인물을 잡은 것이다. 사실 사진집을 보면 대개 전시됐던 오리지널 프린트보다 못하구나, 사진집은 그저 대용품이구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 책은 달랐다. 전시장에서 이 사진만 봤거나 사진없이 그냥 텍스트로만 사연을 접했다면 어땠을까. 사진과 텍스트가 사이좋게 서로를 돕는다는 점에서 두고 볼 만한 책이다.”
구성연/ 개인전 <나비> <유리> <구성연전> <모래> <화분>·단체전 <사진의 피부, 회화의 껍질> 등·현재 <3인의 디지털 미장센> 전시
두려움을 에너지로 바꿔주는 설득의 화술
패션사진가 이전호의 베스트,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Choice/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데이비드 베일즈·테드 올랜드 지음/ 임경아 옮김/ 루비박스/ 2006년
흔히 예술가는 하늘이 내린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라고 철석같이 믿어왔다.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는 첫장에서부터 그런 편견은 제발 좀 버리라고 말한다. “예술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일갈하면서 말이다. 창조의 문턱에서 좌절한 이들은 수없이 많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사진 또한 마찬가지다. “사진을 시작하면 구체적인 테크닉을 습득하는 것보다 내가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러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프로가 되더라도 마찬가지 두려움에 시달린다.” 이전호에게 <예술가여…>는 두려움을 에너지로 바꾸게 해준 비타민이다. “무슨 작업을 할 때마다 새로운 걸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사진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다들 그렇지 않나. 그럴 때마다 이 책의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이전호가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입하는 구절은 이렇다. “훌륭한 작품을 완벽한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중략)…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만이 결점을 드러내며 예술을 창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무기는 다양한 사례와 조사를 통한 설득의 화술이다. “장면의 모든 요소들이 정확히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면 아마 한장의 사진도 찍지 못했을 것”이라는 안셀 애덤스의 고백과 앗제로부터 위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명 사진작가들이 당대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역사들을 언급하는 이 책은 ‘사진’에 빠져들기로 맘먹었다면 꼭 챙겨야 할 구명조끼다.
Another Choice/ 샬럿 코튼의 <Imperfect Beauty>
“뉴욕 출장 가서 전시회에서 산 책인데, 닉 나이트를 비롯한 그룹 쇼 스튜디오 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사진집이다. 광고사진의 대가이지만 닉 나이트는 좀처럼 멈춰서지 않는다. 대개 마스터가 되면 이 정도 했으니까 됐어 하는 자위 같은 게 있는데 닉 나이트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 책은 쇼 스튜디오가 단순한 파워집단으로서의 커넥션이 아니라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크리에이티브한 그룹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경주를 하는 것도, 경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라는 책 속 크랙 맥딘의 말처럼, 상업사진을 찍으면서도 사진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전호/ 패션사진가·<올드보이> <가족> <주먹이 운다> <너는 내 운명> <태풍> <나의 결혼원정기> <왕의 남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포스터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