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 무렵, 신도림 방향 2호선 지하철은 그야말로 만원이다. 타는 사람은 많은데 내리는 사람은 없으니 상황은 점입가경. 환승이 가능한 교대역과 사당역은 혼란의 피크다. 단 일분도 안 되는 시간에 빈자리가 생겼다 없어지니 사람들의 발놈림도 빨라진다. 이런저런 이유로 몇달간 삼성역에서 저녁 7시 지하철을 타야 했던 나는 어느새 ‘2호선의 순리’를 알아차렸다. 넓게는 서울과 수도권, 좁게는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2호선은 패션과 문화, 돈과 외모의 일상을 위아래로, 양옆으로 가르고, 지르며 달린다. 정말 수긍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삼성역엔 정말 ‘삼성스러운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사당역엔 정말 ‘사당스러운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삼성과 사당 사이, 사당과 신도림 사이의 경계도 명확하다. 꽤 오랜 시간 지하철을 타야 하는 나는 다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재고, 나눈다. 매우 생리적인 이유로 작동하는 판단이지만 조금 불편하다. 외모가 지역성과 결부될 때, 어렵게 앉은 자리는 결국 바늘방석을 피하기 어렵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일본 드라마 <시모키타 선데이즈>에는 후지이 후미야의 <시모키타 이상 하라주쿠 미만>이란 노래가 흐른다. 이 드라마는 이시다 이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인데 시모키타지와라는 지역에 대한 묘사가 인상 깊다(이시다 이라이는 <I.W.G.P>(Ikebukuro West Gate Park)에서 이케부쿠로 지역 청춘들의 삶을 그려내기도 했다). 시모키타지와는 우리나라의 대학로처럼 연극 극단이 모여 있는 지역이다. 젊음, 패션 등의 키워드로 묶이기도 하지만 신주쿠, 하라주쿠와는 달리 무언가 순수예술의 낭만이 묻어난다. 후지이 후미야는 ‘시모키타 이상 하라주쿠 미만’을 ‘안타까움 이상 슬픔 미만’이라고 노래한다. 또 ‘전해질 듯하면서도 초조한 사랑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연애의 감정을 지역성의 차이로 대조시킨 가사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시모키타 이상, 하라주쿠 미만. 이 표현을 한국으로 옮기면 정확하진 않지만 대학로 이상, 압구정 미만이 되지 않을까. 똑같이 젊음의 거리로 수식되긴 하지만 뉘앙스가 다른 곳. 발길이 닿을 듯하면서도 서로 잘 이어지지 않는 거리. 그러나 대학로와 압구정 사이엔 별로 귀엽지 않은 감정의 괴리가 있다.
대학 입학 뒤, 나는 인천이 집이라는 말에 “인천 사람들은 무섭지 않냐”는 대답을 듣곤 했다.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왜 인천은 무서운 도시가 된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국에서 지역성은 주로 돈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정치로 채색된다. 그래서 경상도 남자, 전라도 여자 식의 표현은 폭탄발언이 돼버린다. 한국에는 연애 감정에 비유할 만한 지역들이 없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인천은 기껏해야 ‘서울지망생’이었고, 영화에서 곧잘 다뤄지는 강원도는 지도에서 찾아볼 수도 없는 순수의 이상향이다. 불편하지 않은 지역적 발언이, 한국에선 불가능하다. 물론 일본에도 지역 차별적인 인식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순수한 지역적 담론도 풍부하다. 풍부한 드라마가 지역을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나게 한다. 올해에만 (한국의 용산과 같은) 아키하바라에 대한 얘기가 드라마, 영화, 소설로 오고 갔다. 그러니까 다시 대학로 이상 압구정 미만. 한국의 지하철은 슬픔을 가로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