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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감독들 [2]
최하나 김현정 2006-10-30
삶과 사랑을 향한 평화의 메시지

아시아 영화의 창 상영작 <하나>

9·11 테러는 3천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 사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세계적 증오심과 복수심에 불을 붙인 결정적 도화선이기도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곳곳에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던 적의를 향해 발언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옴진리교 사건을 모티브로 한 <디스턴스>, 영아 유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무도 모른다> 등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화두가 그를 자극한 것이지만, 그의 고민은 18세기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하나>로 그 물꼬를 틀었다. “다큐멘터리가 나의 출발점이어서 그런지, 사실적인 느낌의 영화를 선호했다. 하지만 그런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완벽한 픽션을 가볍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만들고자 했다.”

고레에다 감독의 첫 번째 시대극 <하나>는 사무라이극인 동시에 사무라이극의 클리셰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영화다. 주인공 아오키 소자에몬(오카다 준이치)은 아버지의 원수 가나자와(아사노 다다노부)에게 복수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촌부의 공격에 힘없이 나가떨어질 만큼 나약하다. 원수의 소재를 찾아냈다는 거짓말로 매일같이 돈을 뜯어내는 남자, 습관처럼 어설픈 할복을 시도하는 로닌 등 고레에다 감독이 창조해낸 풍성한 캐릭터들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경쾌한 유머감각으로 이어지고, 이는 사무라이라는 단어에 씌여 있던 비장함과 장렬함의 허세를 벗긴다.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영웅과 현란한 칼싸움이 사무라이극의 전부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지금 무사도 정신이 국가의 정체성인 양 부상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일종의 반발 심리가 있었다. ‘사무라이가 실제로는 그렇게 멋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웃음)”

복수와 대의가 힘을 잃은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삶이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순간들을 통해 삶의 찬란함을 이야기하는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화법은 <하나>에서도 빛을 발한다. 복수심을 삶을 향한 애정으로 치환해가는 아오키의 궤적이 관객의 마음에 와닿은 것은 학교 밖으로 울려퍼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연인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시장 풍경 등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응시하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다. “‘하나(花)’는 일본에서 흔히 벚꽃과 동일시되고, 벚꽃은 전통적인 사무라이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하지만 내가 의도한 ‘하나’는 전혀 다른 의미의 꽃이다.” ‘벚꽃은 떨어질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 ‘벚꽃은 다음해에 다시 피어난다’로 대응하는 영화 속 장면처럼, 고레에다 감독의 ‘하나’는 죽음이 아닌 삶을 향해 꽃을 피운다. <하나>는 삶과 사랑을 향한 찬가인 동시에 감독이 던지는 평화의 메시지다.

“복수를 다루면서도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하나>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하나>에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이 매우 섬세하게 묘사됐다. 캐릭터를 어떠한 방식으로 구축하나.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하나>의 경우 주인공을 매우 나약한 남자로 설정한 뒤, 그를 이용하거나 이해하는 인물들을 차례로 만들었다. 주인공과 맺는 관계를 통해 캐릭터를 만들어낸 셈이다. 또 영화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한 뒤, 그것을 향해가는 과정을 조금씩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인물들을 배치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하나>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무엇인가. =굳이 한 가지를 꼽으라면, 아오키가 원수 가나자와를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부분을 선택하고 싶다. 원수를 눈앞에 둔 그는 가나자와가 부인과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말없이 돌아선다. 그의 내면에 결정적인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오카다 준이치, 미야자와 리에, 아사노 다다노부 등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어떠한 기준으로 캐스팅했나. =복수라는 무거운 모티브를 다루면서도 작품에 유머를 불어넣을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연기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코믹한 느낌과 어울릴 수 있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차기작은. =간단히 말해서 절실한 러브스토리고, 일본 배우가 아닌 아시아의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상은 비밀이라 말해줄 수가 없다. 미안하다. (웃음)

‘지금’에 집중하는 이들을 위한 달콤한 위로

아시아영화의 창 상영작 <무화과의 얼굴>

1971년 이치가와 곤의 <다시 한번 사랑을>로 데뷔한 모모이 가오리는 삼십년이 넘도록 일본의 대표적인 여배우 중 한명으로 활동해왔다. 이제 오십이 넘었으니 더이상 새로운 일을 시도하지 않을 법도 하지만 모모이는 그 때문에 오히려 감독으로 데뷔하기로 결심했다. “나이를 먹으니 자꾸 비슷한 역만 들어왔고, 이제는 늙어가는 모습만 보이겠구나 싶었다. 주변에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연출을 해보라고 권하기에 마음을 먹었다. 일본은 여자란 얌전하고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나라여서 감독이 된 여배우는 내가 처음이었다.” 모모이는 자신의 주얼리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이고 열장이 넘는 앨범을 낸 가수이며 이제는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그녀의 영화 <무화과의 얼굴>은 무뚝뚝한 아버지가 이따금 애틋한 속내를 드러내듯, 속깊은 순간들이 스쳐가는 영화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죽은 다음 어머니는 상실감을 느끼는 듯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야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딸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짝사랑하던 남자의 아이를 낳아 혼자 키운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가족. 그러나 아버지가 떠난 빈자리는 문득 무화과 나무보다도 커다래지곤 한다. 모모이는 언뜻 무심해 보이는 이 관계가 가족이 아니라 친구들이어도 상관없었으리라 말했다. “내가 찍고 싶었던 테마는 ‘지금의 행복’이었다. 어떤 여자가 남자친구로부터 다이아몬드를 받는다면 그녀는 프러포즈를 기대하게 된다. 그 때문에 다이아몬드를 받은 행복을 놓치는 것이다. 시간은 급하게 흘러가므로, 현재는 순식간에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되는데도.” <무화과의 얼굴>에서 그 행복을 즐기고자, 살아남고자 주먹을 꼭 쥐는 인물은, 어머니다. “슬프다고 하여 그 슬픔에 젖어버리면 안 된다. 생명은 살아 있다는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고, 오래오래 살아남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어머니는 죽은 남편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담배를 피워 없애면서, 그를 잊고 살아남고자 결심한다. 그녀는 생명력이 강한 여인이다.”

한밤의 마당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메마른 무화과나무 가지에서 열매가 솟아오르는 환상을 목격한다. 모모이가 “여인의 가슴을 닮았기 때문에 여인들을 위한 이 영화에 어울린다”고 말했던 무화과. <무화과의 얼굴>은 즙이 많은 과육과 자잘한 씨앗을 가득 품은 무화과처럼, 슬픔을 잊고 살아 있는 순간에 집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달콤한 위로를 전해주는 영화다.

“상실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잊으려 하는 것이다”

<무화과의 얼굴>의 모모이 가오리 감독

-<무화과의 얼굴>의 가족은 마당의 무화과나무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이 나무를 택한 까닭은 무엇이었나. =어릴 적 집에 무화과나무가 있어서 이사갈 때마다 파가지고 다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젓가락이나 슬리퍼 같은 할아버지의 소지품을 나무 그늘에 묻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택한 것 같다. 그 무렵 일본에선 무화과를 가게에서 팔지 않았고, 주로 집에서 따먹었기 때문에 무화과는 “아, 집이다”라는 느낌을 가지게도 한다.

-인물의 얼굴을 정면에서 잡는 순간이 많아 독특한 느낌이었다. =부부는 흔히 비스듬한 각도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게 된다. 하지만 아내와 남편의 얼굴을 정면으로 찍으면서, 남편은 죽기 전에 저런 식으로 아내의 얼굴을 보곤 했겠지, 아내도 그랬겠지, 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다음 너무 쉽게 재혼한다. 표현하진 않아도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가 좋아하는 반찬을 사오기도 하고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그를 잊고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아마 그녀는 예전부터 술집에서 일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했지만, 이제는 그녀는 술집에 나가 서빙을 할 수도 있고, 다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녀가 느끼는 상실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잊고자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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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씨네21 PIFF 데일리 사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