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페이소스를 듬뿍 친 유머-켄 로치 드라마의 웃음
켄 로치의 드라마는 유머로 가득하다. 직장도 없고, 있다 해도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비정규직이며, 정부나 직장의 보호권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켄 로치는 유머를 건져낸다. 설령 영화 속 배경이 실직과 절망으로 얼룩졌다 하더라도 캐릭터들은 웃음을 잃는 법이 없다.
켄 로치의 하층민들을 공격하는 건 무한질주하는 자본의 무자비함인데, 그것은 보통 똥으로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하층민들>에서 건설노동자 래리는 일터에서 화장실을 찾아 헤매다가 모델하우스에 몰래 들어가 해결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근사한 화장실 안에서 모처럼 목욕을 하던(여기 노동자들은 집이 없어 빈집에 들어가 산다) 래리는 집을 보러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히잡 쓴 여인들을 보고 혼비백산한다(감독은 아랍 여성이 들어갈 거란 얘기를 하지 않았다, 물론!). <네비게이터>에서 백발이 성성한 철도노동자 제리는 작업 중 달려가는 기차가 쏟아낸 똥을 뒤집어쓴다. <레이닝 스톤>에서 배관청소 아르바이트나 해보려고 교회를 찾은 밥은 돈을 받기는커녕 똥 세례를 받는다(그는 나중에 더 큰 것으로 보상받는다).
켄 로치의 유머엔 삶의 신산함과 노동자들의 건강함, 여기에 매운 풍자가 겹쳐 있다. 철도청이 없어지고 민간 회사들로 바뀌면서 철도노동자들이 겪는 분열상을 그린 <네비게이터>를 보자. 십장은 ‘1년에 두명 이하로만 일을 하다가 죽을 수 있다’며 바뀐 규정을 브리핑한다. 노동자들은 ‘그럼 세명째 죽는 사람은 해고당하는 거냐’며 받아친다. 노동유연화에 대한 신랄한 유머 아닌가.
“왜 내가 조국을 싫어한다고 말하는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내 고향과 영국인들과 정부를 싫어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부를 비판하는 건 민주주의의 의무다.”
4. 마음을 다치게 하는 신파-켄 로치 드라마의 비극성
켄 로치 감독처럼 귀가 먹먹할 정도로 음악을 아름답게 쓰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음악을 남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한다. 전혀 엉뚱한 상황에 음악을 넣어 관객을 밀치지도 않는다. <하층민들>에서 노래를 못한다고 야유를 받아 쫓겨났던 가수 지망생 수잔은 래리의 도움으로 다시 마이크 앞에 선다. 이때 수잔은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 비틀스의 <위드 어 리틀 헬프 프롬 마이 프렌드>다. <내 이름은 조>에서 리암의 장례식 이후 담담하게 우리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느린 악장은 또 어떤가.
이런 효과는 등장인물을 어루만지는 사려깊음에서 온다. <스위트 식스틴>에서 리암이 엄마와 살 집을 마련하겠노라는 메시지를 테이프에 녹음할 때(마약중독자 엄마는 감옥에 있다), 프리텐더의 <아이 윌 스탠 바이 유>가 소형 스테레오를 통해 흐른다. 회상장면에선 리암이 마약을 팔고 있다. 리암의 누나 말대로 하자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장면이다. 엄마를 지키겠다고 하지만 정작 리암은 자기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이처럼 서정과 신파 사이에 있다. 음악보다 인상적인 켄 로치의 인장이 있는데, 그건 배신의 주제다. 켄 로치의 영화에 출몰하는 이상한 신파성, 그건 적이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빵과 장미>에서 미화원들은 열악한 조건을 딛고 연대의 몸짓을 나눈다. 그러나 미화원들의 연대를 밀고로 무너뜨리는 건 다름 아닌 마야의 언니 로사다. 로사는 따지러 온 마야에게 자신이 식구를 건사하러 몸까지 판 굴욕의 연대기를 늘어놓는다. <네비게이터>에서 뿔뿔이 흩어진 철도노동자들은 외주를 따내 밤새 작업을 하다가 동료 짐을 열차 사고로 잃는다. 그러나 그들이 걱정하는 건 동료 짐의 운명이 아니라 사고로 인해 자신들이 빼앗길지도 모를 밥줄이다. 실은 이건 신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사랑하는 이들을 분열시키는가에 대한 예민한 관찰이라 해야 옳다. 그것은 지형을 넓혀도 마찬가지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블랑카를 쓰러뜨리는 건 프랑코의 총알이 아니라 같은 좌파 진영의 총알이다. <보리밭을…>에서 밀고자는 다름 아닌 동네 후배이다. 동지들이 힘을 합해 적을 무너뜨리는 판타지 같은 요소는 켄 로치 영화엔 없다.
이런 뻔해 보이는 신파적 요소가 실은 우리가 숨기고 싶은 치부이자 냉엄한 리얼리티일지도 모른다. 켄 로치의 미덕은 이런 불가피함을 토닥이며 껴안고 간다는 데 있다. <네비게이터>에서 꼬장꼬장한 노조지도자였던 제리는 철도사고가 아니라 교통사고로 짐이 죽었다는 옛 동료들의 거짓말을 모르는 척 눈감는다. <빵과 장미>의 미화원 동료들은 마야를 배웅 나온 ‘배신자’ 로사에게 손을 흔들어 함께 있자고 부른다. 삶의 가파름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이기도 하고, 순진한 현실인식이 얼마나 큰 상처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각성이기도 하다. 이상주의자들의 좌절을 그린 <랜드 앤 프리덤>과 <보리밭을…>이 패배주의로 보이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이상적일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들을 눕히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쓰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란 정치적 운동이나 정당이나 논문이 아니다. 그건 그저 영화일 뿐이다. 잘해야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의 분노에 목소리를 더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5. 켄 로치 영화에서 기대할 수 없는 것들-켄 로치 영화를 보기 전 유의해야 할 스포일러
켄 로치 영화를 둘러보기 전 피해야 할 지뢰들, 또는 스포일러가 있다. 켄 로치 영화에서 희망의 비전을 찾기란 쉽지 않다. 켄 로치가 지뢰를 제거하듯 조심스레 정치적 지형을 헤쳐나가는 것처럼, 우리도 그의 영화를 조심스레 봐야 한다. 그의 영화는 대놓고 희망을 얘기하거나 억압을 뚫고 나가는 노동자의 승리를 보고하지 않는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그건 <레이닝 스톤>이고, 거기에 인색하게 하나 덧붙일 수 있다면 <빵과 장미>일 것이다.
주인공들은 현실의 견고한 벽 앞에서 무너진다. 켄 로치의 영화들은 작게 보면 보수적인 대처 총리의 시대가 준 상처의 흔적들이고 넓게 보면 좌파와 노동자계급의 패배의 역사다. 신자유주의적이며 관료적인 정부는 <캐시 컴 홈>과 <레이디 버드>의 가정을 잿더미로 만들어놓았으며, <외모와 미소>의 젊은이들을 거리로 내몰거나 아일랜드의 폭동 진압 현장으로 내보냈고, <하층민들>의 노동자들을 지지대도 없는 아시바(임시로 설치한 가설물)에서 일하다가 떨어져 죽게 내버려두며, <히든 아젠다>에서 영국 정보기관은 인권변호사를 살해한 뒤 사인을 감춰둔다.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진다.
다만 아주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희망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노동자들의 억센 욕설과 낙천적인 웃음과 쓰러져도 무릎 꿇지 않겠다는 자존심이 그들을 일어서게 하고 우리를 일어서게 한다. 그래도 다시 바리케이드를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짧게 보자면 나는 낙관적이지 않다. 악순환이 계속되니까. 그러나 길게 보자면 사람들이 거기에 맞서 싸울 것이니 낙관적이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걸 표현하게 하고, 그 활력을 나누게 하는 거다. 그게 사람들을 웃게 만드니까. 그게 바로 아침에 일어나게 만드는 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