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새터민에게 들은 말. “나도 그 체제가 싫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했다. 하지만 김정일이 일거에 무너지면 미국은 물론이고 여우 같은 일본과 곰 같은 중국이 득달같이 뜯어먹으려들 텐데, 그럼 토끼 같은 남한도 다 같이 잡아먹힌다.” 논란이 따를 비유이나 그의 표정은 절박했다. 제 앞가림도 어려운 처지에서 한반도의 앞날을 끊임없이 걱정했다. 북한 사람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수는 민족의 생존과 체제 유지(혹은 점진적 변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한 날 인터넷에 들어가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는 뉴스만 확인하곤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을 고르는 데 한참을 보낸 나는, 분단의 시간은 남북 사람들의 뇌구조까지 다르게 진화시킬 만큼 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사재기 열풍이 없었던 건 ‘양치기 정일’에게 너무 자주 놀랐고 민족공조 의식도 성숙해진 덕이겠지만, 분단불감증도 그만큼 심해졌다.
핵실험이 사실로 굳어진 뒤에도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11월 중간선거 때 대북정책 실패로 공격받을 것을 우려한 탓인지 워싱턴의 대응은 비교적 신중하다. 하지만 압박의 강도는 커졌다. 북·미 양자 대화가 더 어려워졌다고 쐐기를 박고, 유엔과 국제사회를 동원해 돈줄 끊기, 화물검색 등 대북 피말리기를 할 태세다. 군사적 대응 주장도 공공연하다. 이에 질세라 북한은 추가 ‘물리적 대응’을 예고했다. 또 다른 핵실험일 가능성이 많은데(통상 정확성을 위해 한번에 두 차례 이상 한단다), 어차피 벼랑에서 뛰어내렸으니 이판사판이라는 자세다.
북한이 북·미 직접 대화에 매달리는 이유가 “(어렵게 말해) 미국이 북한의 정권교체를 추진하지 않을 것인지(쉽게 말해 선제공격하지 않을 것인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라는데, 너도 알고 나도 알 듯이 확인한들 뭐가 달라지는데? 정말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협상하며 겨루지 않으면 겨루는 대로 협상하게 된다. 벼랑 밑에서는 다시 기어오르는 길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