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1일/ 9월1일 오후 5시 인사이트 비주얼 회의실
CG 1차 컨펌하는 날이다. 개봉이 10월26일로 확정됐다. 그러나 여전히 정해지지 않은 게 있다. 음악감독. 의아스러운 상황이다. 편집이 끝났는데 음악감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니. <혈의 누> 때 김대승 감독을 감탄시켰던 조영욱 감독과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어떤 음악이 좋을지 의견 조율을 해온 모양인데, 제작자가 최종 승인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역시 제작비가 문제다.
김대승 감독이 CG팀에 대한 격려품을 들고 들어오자 곧바로 회의가 시작된다. 강종익 대표의 인사이트 비주얼과는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 시절인 <축제> 때부터 줄곧 손발을 맞춰왔던 터라 상당히 익숙한 분위기로 본론에 빠져든다. 김상범 편집기사가 주문했던 민주의 사진 찍는 장면을 놓고 제법 긴 시간이 흘러간다. CG팀이 안을 만들어오기로 정리됐다. 김대승 감독의 디테일 챙기기는 편집실에서 이미 봤지만 CG팀이 효과를 입힌 장면들의 수정보완에서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강가를 끼고 달리는 자동차를 부감으로 아주 멀리서 풀숏으로 잡은 장면이다. 촬영 소스에는 강가에 눈과 얼음이 있는데 CG로 손본 장면은 푸릇푸릇한 풍경으로 바뀌어 있다.) 이야~ 한폭의 동양화네. 그런데 역광 느낌을 주게 이 능선 위의 하늘을 더 뿌옇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 뒤 능선은 좀더 뿌옇고. 그래야 원근감이 더 생기지 않겠어요?”
“(유지태가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동강을 앞에 두고 더 높은 곳에서 촬영한 가을 풍경이다.) 어이쿠 근사해졌네. 매직이야 매직. 인사이트 비주얼이 아니고 이은결이야. 근데 저기 꼭대기의 저 부분, 눈인가 얼음인가 아직 약간 티가 나네.”
“(유지태와 김지수가 결혼을 앞두고 시골집으로 찾아가는 장면이다. 자동차 뒤의 먼 후경에 야트막한 산과 그 아래 마을이 배경처럼 스쳐지나간다.) 여기 이 마을에서 밥짓는 연기가 좀 났으면 좋겠어요. 어쩐지 좀 허전해서….”
CG와 관련한 최대의 관심사는 붕괴장면이다. 아쉽게도 주요 장면들은 한창 작업 중이라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김지수가 붕괴 순간에 머물렀던 백화점 안 커피숍 장면에서 CG의 위력을 맛볼 수 있었다. 건물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의 벽이 쩍쩍 갈라지며 비명이 터져나온다. 원래 촬영소스에선 배우들이 멀쩡한 맨바닥을 보고 비명을 지른다. 좀 무안했을 것 같다. CG로 바닥이 실감나게 갈라지자 일촉즉발의 느낌이 살아났다. 이 장면에 더해지는 감독의 요구는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갈라지는 속도가) 좀 빠른 거 아닌가요? 저 기둥 뒤에선 천천히, 이 앞에선 빠르게 가는 게 어때요? 그러면 훨씬 무거운 느낌일 텐데.”
강종익 대표가 세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놓은 장면을 비교해볼 수 있도록 동시에 화면에 띄우면서 약간 계면쩍어한다.
“가장 까다로운 작업 중 하나예요.” “쉬운 게 없죠.”
커피숍 내부가 붕괴 조짐을 보일 때,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증기의 방향과 모양까지 손짓으로 만들어 보이던 김대승 감독의 주문은 붕괴된 뒤 구조 현장에 대한 코멘트에서 절정에 달했다. 폐허처럼 된 잔해 위에 구조 인력이 어지럽게 오가는데 그 뒤에 커다란 블루매트가 걸려 있다.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백화점 건물을 CG로 만들어넣어야 하는 곳이다.
“이 순간이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사람 다 구하고 여유가 있달까. 나른해졌다는 느낌이죠. 구조에 별 신경쓰지 않는 단계랄까.”
지켜보던 내 속에서 한숨이 나왔다. ‘휴~ 그게 가능할까. 어쨌든 정말 섬세하시군요!’
director's flashback “그러잖아도 빠듯한 일정 때문에 난감했는데 일정이 갑자기 더 당겨지면서 CG 제작이 아주 심각했고, 몇몇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 됐다(<가을로>가 부산영화제 개막작이 된 건 1차 CG 컨펌 뒤의 일이다. 이 회상 코멘트는 영화제 개막일 일주일 전인 추석 전날 받았다). 시간을 투여할수록 좋아지는 게 CG고 한달을 더 줘도 모자랄 판국에 한달 가까이 당겨버렸으니 얼마나 죽겠나. 그런데 이 정도가 나온 게 기적적이다. 물론 영화제 끝나고 손을 좀더 봐야 한다. 붕괴될 때 돌덩이들 떨어지는 속도 같은 거…. 촬영하면서 자꾸 <서편제>와 <태백산맥> 촬영현장이 떠오르면서 임권택 감독님 생각이 많이 났다. 계절을 앞서가면서 찍어야 하는데 자꾸 쫓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가을이 얼마나 짧나. 단풍이 시작됐다 하면 벌써 끝난다. 프로덕션 기간에 단풍만 찾아다니면서 찍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느 신이 중요하므로 단풍이 나올 때 그 신을 중심으로 일정을 잡는 게 중요해진다. 그러니까 안 되는 신이 있는데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회상이었는데 판타지로 바꾸는 식으로 시나리오 설정을 바꾸는 것 아니면 소스를 여러 가지로 찍어주면 CG에서 겨울장면을 가을장면으로 바꿔주고 DI에서 색을 한번 더 돌려주고. 이 영화에서 여름, 겨울 장면은 대개 계절에 맞춰 찍은 거고, 가을장면은 놓쳐서 후반작업에서 해낸 경우가 많다. 스크린으로 한번 봐야 할 텐데 정말 궁금하다. 만약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큰일인 게, 가령 불영사 같은 사찰은 굉장히 아름답고 개인적으로도 무척 좋아하는 곳이다. 사람마다 그 장소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어 저거 뭐야 왜 저따위로 찍었지, 이런 부담이 기획할 때부터 엄청나게 있었다. 잘 찍어야 본전인데. 겁없이 덤벼들었구나 싶기도 했고. 다행히도 CG팀, DI팀이 워낙 베테랑이어서 많이 보태주신 것 같다.”(김대승)
CG's flashback “<가을로>의 CG 포인트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계절에 대한 표현이다. 실제 원하는 계절을 찍을 수 없었던 상황이 많으니까. 두 번째는 삼풍백화점 붕괴장면인데 이게 아주 골치 아프다. 폭파에 의한 붕괴는 참고 사례가 많은데 이것처럼 외부부터, 위부터 차례로 무너져내린 경우가 없다. 그래서 미니어처를 만들었어도 표현하기가 아주 어렵다. 게다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도심 한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라 CG가 해야 할 일이 보통이 아니다.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도 아주 힘든 상황이고. 예상은 했지만, 우리 입장에선 미니어처 폭파장면이 흡족히 찍히지 않은 점도 어렵다. 김대승 감독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나름의 세계관이 있다. 예를 들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뀔 때 일반적으로 바뀌는 컷과 달리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좀더 의미를 부여한다(가령, 다른 시간대지만 소쇄원이라는 같은 공간에 머무는 김지수와 유지태로 시선을 옮기는 장면은 기발하면서도 아름답게 찍었다). 이건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작업이다. 그리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을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김지수가 손 흔들고 지나가는 장면에서 그 뒤 찻길로 쓰레기차가 지나가는데 지워줬으면 한다. 뭐, 우리도 충분히 공감하니까.”(강종익)
D-28일/ 9월14일 오전 11시 웨이브랩 스튜디오
<가을로>가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김대승 감독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 개봉일보다 2주일 이상 앞당겨 완성해야 하는 일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지금이라도 욕심내지 말고 취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정말로. 개막식에서 (CG 미완성으로) 블루매트가 그냥 나가면 우리보다 영화제쪽이 국제적 망신이잖아요.”
음악감독과의 계약이 자꾸 지연되는 점도 우려스러운 상황. “<혈의 누>처럼 영화 자체가 굵직해서 내달리는 힘이 있으면 음악이 섬세하게 맞지 않아도 문제가 없지만 <가을로>는 느낌이 조금만 달라도 곤란해요. 조영욱 음악감독과 헨델, 브람스 등의 곡으로 느낌을 맞춰왔는데 지금 돈도, 시간도 없어 머릿속으로 맞춰놓은 걸 쓸 수 없게 된 형편이에요. 속상합니다.”
김지수의 등장으로 현장 분위기는 자연스레 ADR(automated dialogue replacement: 후시녹음)로 넘어갔다. ADR은 동시녹음을 보완하거나 대체하는 작업이다. 모니터에 편집이 끝난 화면을 띄워놓고 배우가 부분부분 대사를 다시 읊는다. 잠시나마 성우 아닌 성우가 되는 것인데 촬영을 다시 하는 것도 아니니 뭐 어려울까 싶었다. 오해다. ADR을 시작하자마자 녹음기사와 감독 모두 김지수의 가라앉은 목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연신 물을 들이켜며 녹음을 거듭하는 김지수의 출발이 지난한 고행의 예고편일 줄이야. 디지털 기기의 효능으로 화면과 입을 맞추어내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좁은 부스 안에서 배우 홀로 리얼한 현장감을 되살리며 미묘한 감정선을 조율해야 한다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ADR의 상당 부분은 편집 결과 감정이 조금씩 튀는 흐름을 맞추는 작업이다.
“아쉽지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남은 사막이라는데….”(모래사막이 있는 섬에서 김지수의 대사) “바깥 소음과 풍경에 비해서 너무 가라앉아 들리는데요. 조금 톤을 올려보죠.”(감독)
김지수가 다시 대사를 친다.
“지금 건 동시녹음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사라진다는 기분을 좀 바꿔볼까요?”(감독)
김지수가 다시 한번 대사를 친다.
“아무래도 목이 너무 잠겨 있어요.”(녹음기사) “동시녹음에 감정이 너무 들어가 있어서 조금 빼보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렇다고 바람 소리를 세게 넣을 것도 아니고.”(감독) “아~, 어렵다. 너무 어려워!”(김지수) “난 (디렉팅을) 말하기 쉬운데.”(감독) “정말 이럴 땐 감독하고 싶어. 다시 해보죠.”(김지수)
다시 또 대사를 친다.
“동시녹음을 같이 들려주니까 자꾸 비슷하게 나오는 것 같아요.”(감독) “그럼 (모니터의 동시녹음) 소리를 줄여서 들려주세요.”(김지수)
또다시 대사.
“차라리 좀 전 것이 더 좋은데요.”(감독) “감독님! 한번만 다시 할게요.”(김지수)
잠시 쉬는 틈을 타 부스 바깥으로 나온 김지수에게 “이게 만만한 작업이 아니네요” 했더니 바로 맞장구를 친다.
“감독님 원하는 게 뭔지 이론적으로는 알겠어요. 그렇지만 그게…. 전 ADR이 제일 힘들어요. 진빠지지. 입맞춰야지, 감정 맞춰야지. 그나마 이건 분량이 적은 거예요. <로망스> 때는 ADR 때 갖가지 호흡을 다했어요. 키스하기 직전의 떨리는 호흡, 맞는 호흡…. ADR 좋아하는 배우가 간혹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 싫어하죠.”
2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감독이 점심 먹고 하자는데 김지수가 거부한다.
“밥 많이 먹으면 헉헉거려요. 호흡이.” “아니? 얼마나 먹으려고.” “ADR 때는 조금만 먹어도 그래요. 마저 좀더 하고 먹어요.”
식사를 마친 뒤 곧바로 긴 내레이션 녹음이 시작됐는데 길이도, 감정도 만만치 않아 자꾸 NG가 난다. 작업을 시작한 이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지쳐가는 배우. 대사 한번 치고 ‘들어보겠다’는 감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철퍼덕 쓰러지듯 앉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오후 3시30분께 엄지원이 도착하면서 분위기가 살짝 전환됐다. “지원씨도 목 풀어야지. 지수씨 잠깐 나와서 좀 쉬죠.” 김지수가 나오며 하소연한다. “붕어도 아니고 지금 물을 얼마나 마신 거야. 물배 차서 죽을 거 같아.”
엄지원의 ADR은 곧바로 강적을 만났다. 붕괴 순간의 비명과 울음을 다시 녹음해야 한다. 헤드폰을 쓴 엄지원은 실제로 울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도 본다. 감독의 까다로운 기준에 맞추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간다. 오후 5시쯤 오기로 한 유지태가 좀체 나타날 기미가 없다. 연락을 취해보니, 누군가의 착오로 양수리 종합촬영소의 녹음실로 향하고 있었다. 차를 돌려 돌아오니 저녁 7시가 다 됐다. <황진이> 촬영 때문에 길게 만든 머리와 수염, 그리고 푹 눌러쓴 모자가 <가을로>의 현우와는 딴판이다. 사흘째 300명에 가까운 보조출연자와 더불어 액션신을 찍느라 피곤하다면서도 <가을로>의 포스터 시안을 보자 기운 생생하게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는다. 김지수가 마지막 분량을 녹음하기 시작하자 엄지원에게 눈에 보이는 기기들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늘어놓는다.
“ADR을 아날로그 펀치로 하는 시대가 있었어. 정확히 입을 맞춰도 (화면과) 늘 조금씩 밀리는….”
director's flashback “지수씨에게 참 고마운 게 특별히 격한 감정이 튀어나오는 건 아니지만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지태씨와 지원씨 둘만 가도 지수씨가 내내 함께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고, 그래서 초반에 강해야 하는데 또 강하게 찍어선 안 되고…. 원래 그런 연기를 하는 분인지 모르겠지만 안 휩쓸리는 사람이다. 눈 내리는 장면에서 울컥할 수 있는데 눈물 한 방울 정도만 하고 주문하면 딱 그렇게 한다. 예컨대, 지태씨가 커피 가지고 오다가 눈길에서 슬쩍 미끄러지는데 그걸 보는 지수씨가 웃기기는 한데 너무 사랑해서 그 웃음조차 눈물이 좀 날 것 같고, 입은 웃고 있는 것 같은데 눈에선 눈물이 날 것 같은 아스라한 분위기였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게 참 말이 되는지, 그런데 해볼게요 하더니 한 거다. 그리고 지원씨가 오열하는 장면을 찍을 때 현장에서 소름끼치게 잘했는데, 무너진 벽을 손으로 두드리며 했는데 그 소리가 세트라 쓰기가 곤란한 거라. 너무 아깝지만 할 수 없이 ADR 했는데 지원씨가 잘 해놓고도 가면서 ‘감독님, 동시 써주세요’ 하는 거라. 그래서 녹음실 엔지니어가 힘들어졌다. 세트의 가짜 소리를 대사 다치지 않도록 깎아봐서 괜찮으면 동시로 가는데 좀더 봐야 할 것 같다.”(김대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