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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여백에서 빛을 낸다, <가을로>의 김지수

김지수의 연기는 산문보다는 시에 가깝다. <여자, 정혜>를 시작으로 <가을로>에 이르기까지 김지수가 연기한 배역들에서는 감정의 파고가 쏟아져나온다기보다 은은히 배어나왔다. 격정적인 대사나 극적인 표정 변화가 아닌 그 사이의 알쏭달쏭한 감정의 잔물결은 시구의 풍부한 상징과 함축처럼 여백을 남겼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주 등장하지 않아도 영화 내내 가득한 존재감. <박수칠 때 떠나라>의 정유정은 출연 빈도로만 보면 아주 작은 역할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고, 사건의 열쇠를 쥔 여인이었다. <가을로>의 민주 역시 그렇다. 그녀는 회상장면에서나 존재 가능한,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여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있다. 말로 설명하는 대신 그 존재로 인물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김지수와 김지수가 생각하는 <가을로>는 그래서 닮은꼴이다. “예쁜 시 한편 읽은 것 같다. 풍경화 같은 느낌이 참 좋은 영화다.”

영화가 그녀를 재발견했다는 말은, 15년간 꾸준히 연기를 해온 김지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TV연속극과 영화의 타깃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녀는 오랫동안 역할에 맞는 연기를 했을 뿐이다. “일시적인 환호에 흔들리지 않는다. ‘영화를 안 하다 해서 그렇지, 한 3년만 지나봐’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 적도 있다. 배우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계속해야 하고, 그 결과를 끝없이 평가받는다. 좋은 평가는 감사드릴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랑할 일도 아니다.” 김지수는 자신과 가장 멀었던 여자, 정혜로 영화에 발을 디뎠고, <가을로> 개봉 뒤에는 또래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혜란(<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으로 촉촉한 멜로를 선보인다. 그녀의 눈물이 당신의 가슴을 흥건하게 적시는 이유는 그녀가 웃을 때 환하게 빛날 줄 알기 때문이다. 혼을 불사르는 것보다 힘든 평범한 삶의 고통을 아는 처연한 그 미소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 때문에.

김지수가 말하는 유지태

“<가을로> 때문에 지태씨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지태씨는 무게감있는 느낌이랄까. 실제로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영화를 찍으면서 어리다든가 후배라든가 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가을로>에 지태씨가 캐스팅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유지태 덕 좀 봐야겠다’고 농을 한 적도 있다. (웃음) 지태씨가 연기하는 현우의 옛 연인인 민주를 연기하면서, 나는 민주가 현우보다 누이 같고 엄마 같고 어른스러운 느낌으로 다가갔으면 했다. 보는 사람이 영화 내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처럼, 현우의 여행에 민주가 동행한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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