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괴로운 순간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힘들었던 장면이 떠오를 때다. 기억 속의 나는 고통받는 처절한 피해자지만 종종 나의 탐욕이 그 결과에 도움을 주었을 경우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이때 비겁하긴 해도 손쉬운 정신적 해결책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에의 충동’이 있다. 상상에서나마 가해자에게 참혹하게 복수하거나, 나 자신을 자책의 구렁텅이로 빠뜨림으로써 정신적 위안을 얻는 것이다. 소노 시온 감독이 <기묘한 서커스>에서 발휘한 상상력을 빌려서 표현한다면, 가해자의 사지를 전기톱으로 자른 뒤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은 시련을 당하도록 방치하고, 못난 나의 피부를 벗겨 집안의 도배지로 활용한다. 이것으로도 모자란다면 그 모든 기억의 기표를 환상의 환상의 환상… 이라고 무한히 미끄러트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이다. 학교 교실의 교단에는 소설 <1984>에서 등장한 텔레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화면 속에서 훈계를 하는 교장 선생님은 학생인 12살 소녀 미츠코(구와나 리에)의 아버지다. 그가 딸을 탐하는 방식은 강압적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데 구멍을 뚫어놓은 첼로 가방에 딸을 넣은 뒤 부모의 성교를 훔쳐보도록 한다. 미츠코는 이런 관음에 취해서 어머니 사유리(미야자키 마스미)의 자리를 탐한다. 질투심에 광분한 어머니가 사고로 죽자 미츠코는 아버지의 여자로 살아가지만 자책감 때문에 자살을 시도하다가 결국 휠체어 인생을 살게 된다. 남성 권력의 장 안에서 조종되는 여성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러나 이상의 이야기는 영화 중반에 사유리와 같은 모습을 한 타에코의 소설 내용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렇다면 미츠코는 휠체어를 탄 타에코의 어린 시절일까? 아니면 딸을 죽인 사유리가 자책감에서 자신을 딸로 치환한 것일까? 거듭되는 반전의 스릴감은 영화의 진행에 탄력을 준다. 노골적으로 남자를 밝히는 타에코가 정체불명의 출판사 직원 유지(이시다 이세이)를 만나면서 문제는 한층 복잡해진다. 가족사의 미궁이 밝혀지는 듯하더니 현재도 현실, 꿈, 서커스의 사형대 사이를 거듭 평면 이동한다. 유지는 관객에게 조롱하듯이 말한다. “과연 어떤 것이 꿈일까요?” 전작 <자살 클럽>에서 잔혹한 죽음에 현혹당하는 현대인을 비판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유지의 질문은 가부장제를 감내의 숭고함으로 소비해버리는 풍조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소노 감독은 이 작품으로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진보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독특한 코드의 아시아영화”라는 평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이래 엽기적인 소재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